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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음악 전문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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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희 전문가
엘림실내악단
Q.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국화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무궁화의 'syriacus'라는 종명은 '시리아 원산'이라는 뜻이지만, 학계에서는 원산지가 시리아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인도와 중국이라는 설을 가장 유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 자생지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옛 문헌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널리 심었던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 중국의 후난성[湖南省]·푸젠 성[福建省] 및 광시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일대에 널리 자생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한반도에서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 山海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상고시대의 지리·풍속을 널리 조사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제9권 해외동경(海外東經)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君子之國在其北……有薰花草 朝生募死)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국은 한반도라는 것이 밝혀졌고, 훈화초는 무궁화를 일컫는 중국의 옛 이름이다. 또한 중국의 〈고금주 古今注〉에는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더라""(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구절이 있다. 이상의 문헌만으로도 한반도에는 수천 년에 걸쳐 무궁화가 널리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신라의 효공왕이 897년 7월 당나라의 광종(光宗)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국서 가운데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 국서를 초한 사람은 중국에까지 문장가로 이름이 나 있던 최치원으로, 그의 문집인 〈최문창후문집 崔文昌候文集〉 제1권에 그 초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신라시대부터 한국을 '무궁화 나라'[槿城]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궁화가 어떻게 한국의 나라꽃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조선의 윤치호 등의 발의로 애국가를 만들면서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조선의 나라꽃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1949년 10월 대통령 휘장과 행정·입법·사법 3부의 휘장을 모두 무궁화로 도안하여 문교부가 제정·사용했고, 1950년에는 태극기의 깃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제정했다.
Q.  조선시대에는 속옷을 어떻게 입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쟁이​치마 안에 입던 바지 모양의 속옷으로 단속곳 밑, 속속곳 위에 입었는데, 남자의 바지와는 형태가 다르며, 밑이 터져 있고 허리끈이 달려 있어 용변에 편리하였다.​속속곳​바지 밑에 입는 것으로 단속곳과 형태가 같은데, 다만 치수가 단속곳보다 약간씩 작고 바대와 밑길이가 길다. 이것은 살에 닿는 속옷이기 때문에 단속곳과는 감을 달리하였다. 보통 옥양목 ·무명 ·광목 등이고, 조금 고급으로는 명주 정도의 부드러운 감을 사용하였으며, 여름철에는 특히 베 ·굵은 모시 ·광당포 ·안동포 등을 사용하였다.​다리속곳​가장 밑에 입는 속옷으로, 속속곳이 없어지면서부터 다리속곳을 흔히 입어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형태는 홑겹으로 된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찼다.​너른바지​상류사회에서 정장을 할 때 밑받침 옷으로 단속곳 위에 입어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게 한 속옷으로, 특수층에서만 입었다.​허리띠​살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당시의 습관에서 여자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자 저고리와 치마 사이의 겨드랑이 밑 살을 가리기 위해 가슴을 두른 띠이다.
Q.  현존하는 규모가 가장 큰사찰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제일 큰 사찰인 제주도 조선초기 불교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제주도 약천사는. 지상 30m, 건축 3,305 m에 이르며. 단일 사철로 최대크기를 자랑.
Q.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간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한 나라의 국왕의 목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국가와 신하와 백성들의 운명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고 싶어도 함부러 죽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인조처럼 목숨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지금같이 나중에는 멋있었다, 훌륭했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겠지만 그때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죽는다는 것은 국가의 비상사태입니다. 즉 수뇌부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태자로 광해군이 책봉되었지만 선조가 왜군에게 죽는 상황까지 갔다면 광해군이라고 안전할까요? 그런 점에서 제 생각으로는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가서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린 것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이 죽는다는 것은 군사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것이 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 사기가 오른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왕이 죽었으니 이제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싸울 마음을 안 가진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결국 결론은 선조가 내린 판단은 제대로 된것이었으며 선조의 피난을 무턱대고 그 시대의 사정도 생각하지 않고 비난한다는 것은 조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Q.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선생의 또다른 주요한 업적들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서울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을 남겼다.또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4) 등을 펴냈다.《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그의 저작활동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를 물어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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