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 전기에 붕당이 동인 서인으로 나뉜 이유와 주 인물들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임난 일어나기 불과 몇년 전에 정여립의 난이 터집니다이것을 계기로 동인들은 1000여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선비가 죽거나 귀양가고 실각하게 됩니다.그리고 정권을 잡은 서인측의 우두머리인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다가선조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에 동인측에서 다시 정철을 처벌하자는 의견이 나오는데요여기서 갈립니다이산해, 이발 등 정철을 강력히 처벌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북인, 강경파구요유성룡 등이 다시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고 온건히 가자 주장하는게 남인입니다. 이후에는 북인이 광해군의 지지세력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아예 사라져버립니다.북인에는 임난 당시 의병장 출신이 많죠 이후에는 서인-남인의 구도에서 인조반정의 공신인 서인의 주도아래 이어져 내려오다가다시 효종 사망 후 현종의 상복 기간에 대해서 문제가 불거져 다시 서인은 노론-소론 갈라지고노론- 소론,남인쯤으로 가다가 다시 사도세자 건으로 노론이 대북,소북으로 나뉘어집니다
Q. 암행어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실제 하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암행어사라는 말은 제13대 명종 5년(1550)에 쓰여졌으나 실질적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은 제11대 중종 4년(1509)으로서 중종 때부터 암행어사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중종 4년(1509) 11월에 부원군(府院君) 김수동(金壽童)이 "근일 암행어사를 분견해 수령의 범죄를 적발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오."라고 한 발언을 미루어볼 때 이 말은 중종이 당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많이 파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누가 암행어사로 분견됐는지는 명시되지 않아, 최초의 암행어사를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그런데 그 이전인 성종 21년(1490) 암행어사와 유사한 활동을 한 조지서란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조지서는 왕의 측근 관원으로 응교직에 있었는데"지서가 어사가 되어 항상 번개와 같이 관부에 출입함이 야골(野結 : 들에 사는 매)과 같으며, 순찰할 때는 복색이 무상해 혹은 관복하고 혹은 미복(微服 : 변장하는 것)해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어사이면서도 사람들이 그의 행색을 알지 못하도록 변장하며 다니며 관부를 매와 같이 출입했다는 기록은 암행어사의 활동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종 이후 본격화된 암행어사의 활동을 성종때의 조지서가 이미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지서를 최초의 암행어사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Q. 고려시대에 난들이 많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무신정변 원인 :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 문신 위주의 정치에 불만, 열악한 대우에 시달린 하층 군인들의 불만, 국왕과 문신들 사이의 갈등 경과 :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무신 정변 발생(1170년) → 다수의 문신 제거,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도로 귀양 → 명종을 세워 정권 장악 → 문신인 김보당의 의종 복위 실패 → 의종의 제거 무신 간 권력 쟁탈 전개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