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실패한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가는 항상 전쟁 준비를 갖춰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이라, 이이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다고 합니다. 이이는 10만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토론은 큰 성과 없이 끝났고, 조정에서는 급한 대로 몇 가지만 준비한 채 한 해를 보냈습니다.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1592, 임진왜란) 20만이 넘는 대군이었습니다.왜군의 수가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대비가 되었다면 해볼만한 싸움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Q. 가야 국가는 어떻게 해서 멸망하게 됐는지?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야가 어떻게 해서 멸망했는지가 궁금한 것 같습니다. 결국 신라의 진흥왕은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진흥왕 23년, 562).대가야가 망하자 나머지 세력도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마침내 신라에 항복했습니다.이것으로 가야 연맹은 5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가야가 있던 시기는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주변에 있던 백제와 신라는 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영토 확장에 나라의 운명을 걸었지만, 가야는 통합의 의지가 없이 각 나라가 따로따로였습니다.오히려 이런 나라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결국 가야는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Q.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다), 서복, 서불 또는 서시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Q. 문익점은 어떻게 목화씨를 가져올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합니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공헌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합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입니다.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화북산 목화를 가져왔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밭을 보고나서그는 함께 간 종에게 목화씨를 따게 하여 몰래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Q. 반 고흐가 늦은 나이인 30대가까이가 되서 화가로 전환하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빈센트 반고흐는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879년 1월, 빈센트는 벨기에 보리나주에 있는 가난한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직을 맡았습니다.빈센트는 1880년 8월에 퀴엠으로 돌아가 광부와 함께 10월까지 머물렀습니다. 빈센트는 이제 성직보다도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장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자는 남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로엘로프스(Willem Roelofs, 1822~1897)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에 가게 됩니다. 빈센트는 어느 학교에 소속되어 미술을 배우는 것을 싫어했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테오에게 설득되어 1880년 11월,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빈센트는 거기서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