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발해는 수도를 몇 차례 옮겼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발해의 초기 수도는 동모산 인근 지역으로, 현재의 중국 지린성 둔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대조영이 698년 발해를 건국할 당시 이곳을 수도로 삼은 이유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기반지였고, 산악 지형으로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나라나 주변 세력의 침입에 대비해 지리적 고립성과 자연적 방어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이후 발해는 정치적 안정과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습니다.가장 큰 변화는 문왕 시기에 있었는데, 그는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떠 도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는 발해의 국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발해는 동경, 중경, 남경 등 다섯 개의 수도를 두는 오경 체제를 운영하며 국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 했습니다.
Q. 발해의 중앙 정치 체제는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발해의 중앙 정치체제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구성된 이중적 성격의 체제였습니다. 이를 고려나 조선과 비교해보면, 초기 중앙집권적 체제를 발전시키는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발해는 중앙 행정기구로 정당성이라는 최고 관부를 두었고, 그 아래에 6부(吏·戶·禮·兵·刑·工)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6부 체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본뜬 것으로,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관제의 뿌리가 됩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육조(六曹) 제도는 발해의 6부와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하지만 발해의 6부는 당나라나 조선처럼 기능별 부서로 엄격하게 나뉘기보다는, 왕권 보좌와 지방 통제를 중심으로 한 기능이 강했으며, 귀족 중심의 지배체제가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발해는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이 뚜렷하여, 고려 초기와 유사한 귀족 관료제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해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중시하는 유교적 관료국가로 발전했지만, 발해는 왕권이 중심이긴 해도 귀족적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 체제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Q. 발해는 몇 대의 왕이 통치했으며, 가장 영향력 있었던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 229년 동안 존재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총 15명의 왕이 즉위하였습니다.이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었던 왕으로는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년)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문왕은 발해의 정치, 외교, 문화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습니다.문왕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며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용천부으로 옮기고,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뜬 도시계획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대 동아시아에서 높은 수준의 정치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문화적으로도 발해는 이 시기에 불교와 유학이 크게 융성하였고, 교육 기관과 문학 활동도 활발해졌습니다. 일본, 당나라 등과 외교 사절을 주고받으며 국제적 위상을 높인 점도 문왕의 중요한 업적입니다.
Q. 이스라엘의 이란을 공격하는건 정당한 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공식 제재를 부과할 수 있는 지위는 아니지만,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독자적 행동을 감행할 수 있는 '사실상의 영향력'과 군사적 능력을 가진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국가로, 주변 국가들과의 적대적 관계 속에서 자국의 생존과 안보를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특히 이란은 이스라엘을 향해 여러 차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왔고, 이란이 지원하는 무장단체(헤즈볼라, 하마스 등)와도 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란의 핵개발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됩니다.비록 이스라엘은 유엔 안보리나 국제기구처럼 공식적인 제재 권한은 없지만, 군사력, 정보력, 외교력(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등을 바탕으로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독자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1981년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시설, 2007년 시리아의 핵시설을 선제 타격한 사례가 있습니다.따라서 네타냐후 총리가 이란의 핵개발을 막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적 법적 권한보다는 이스라엘의 안보 논리와 실질적 행동 능력에 기반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 경고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필요 시 직접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니다.
Q. 인도에 신분제 계급 카스트제도가 있었다고 하늕데요. 지금도 있나요? 계급을 나눈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카스트 제도는 인도에서 오랜 역사 동안 유지되어 온 신분 제도로, 사람을 출생에 따라 계급으로 나누고 사회적 역할을 구분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힌두교의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며,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야(귀족·군인), 바이샤(상인·농민), 수드라(노동자)의 4계급과 그 밖의 불가촉천민인 달리트로 나뉘었습니다. 각 계급은 직업, 결혼, 생활 방식까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타 계급과의 교류도 제한되었습니다. 1949년 인도 헌법에서 카스트에 따른 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은 위헌으로 간주되며, 정부는 '지정카스트에게 교육 및 취업에서 우대 정책(할당제)을 시행하고 있습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지역, 계층,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카스트 차별이 존재합니다. 특히 농촌이나 소외지역에서는 카스트에 따른 결혼 차별, 직업 제한, 폭력 사건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Q. 이번 이재명 대통령이 회의를한 모디 총리가 했던 우리나라와 인도의 역사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인도 모디 총리는 한국과 인도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강조하며, 양국이 단순한 현대적 협력 관계를 넘어서 깊은 문화적 유대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불교의 전파와 허황옥의 전설을 중심으로 한국과 인도가 고대부터 연결되어 있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먼저, 모디 총리는 한국의 여러 사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경과 문화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는 양국의 문화 교류가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증거라고 설명하였습니다.또한 그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전설도 소개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공주가 한국의 가야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는모디 총리는 이 전설을 두 나라 사이의 오랜 인연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보고, 실제로 인도 정부는 허황옥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유타국의 기념비를 한국 경남 김해에 세우는 데 협력하였습니다.
Q. 발해는 어떻게 건국되었으며, 누가 세웠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발해는 698년에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나라입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멸망 이후의 혼란 속에서 일어난 일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의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당시 고구려는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져 유랑하거나 저항세력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대조영은 이러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세력을 이끌고 동모산(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일대로 이동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698년, 당나라 장수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격파한 이후, 대조영은 스스로 진국(震國)을 세웠으며, 이후 국호를 ‘발해’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구려의 유민임을 자처하며,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삼고자 했습니다.발해는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여, 당나라, 일본, 신라 등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문화와 경제에서도 번영을 누렸습니다.
Q. 과거 삼국시대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세 나라는 서로 긴밀한 문화적·지리적 연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인 언어 계통에 속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학계에서는 이들 삼국의 언어가 모두 알타이어계 또는 초기 한국어의 방언적 차이로 보고 있으며, 기본적인 어휘나 문법 구조는 서로 비슷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삼국이 서로 교류하고, 왕족 간 혼인이나 외교, 전쟁 등을 자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상호 이해가 가능한 언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공통된 부여계의 영향을 받았고, 신라는 진한의 토착 언어를 바탕으로 발전했지만 고대에는 언어적 차이가 지금보다 덜 분화되어 있어, 방언 수준의 차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일부 지명, 인명, 고유어 등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요소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Q. 아랍인과 유대인의 출천지 원수가 된 경위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은 팔레스타인 땅을 둘러싼 민족적,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이 지역의 아랍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자 아랍인들의 반발이 거세졌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과 함께 본격적인 전쟁과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중동전쟁과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테러와 보복이 이어지며 양측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