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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이동광 전문가
카이로스 아카데미
Q.  세종이 실시한 의정부 서사제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이 실시한 의정부 서사제는 조선 초기의 정치 제도로, 국왕의 권한을 일정 부분 제한하고 의정부의 대신들이 국정 전반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게 한 제도입니다.이는 세종이 즉위한 이후인 1419년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의정부 서사제의 핵심은, 왕이 모든 국정을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국정 사안들을 먼저 의정부에 제출하여 대신들의 합의를 거친 후에 왕에게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먼저 협의하고 문서를 작성한 뒤 왕이 최종적으로 결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세종은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신하와 함께 논의하는 정치를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여겼으며, 독단적인 통치를 지양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정부서사제는 왕권의 자율적 절제가 바탕이 되었으며, 신하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정치의 안정성과 합리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Q.  조선시대 노비들이름은 왜전부촌스러웠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노비들의 이름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시 신분 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며, 사람의 이름조차 신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양반이나 상류층 사람들은 한자 이름을 사용하고, 의미 있는 글자를 선택하여 가문과 교양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반면 노비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정식 한자 이름을 갖지 못하거나, 주인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속되게 지은 이름을 사용하곤 했습니다.노비 이름은 흔히 동물 이름(개똥이, 쇠돌이), 천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 또는 사람이 아닌 존재처럼 부르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이는 노비가 독립적인 인격체라기보다는 재산이나 도구처럼 여겨졌던 당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 것입특이하거또한 주인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피하거나, 혼동을 막기 위해 특이하거나 낮은 어감의 이름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Q.  옛날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쌀이나 잡곡류를 저장해놓은 장소나 시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옛날 우리나라에는 쌀이나 잡곡류 같은 곡물을 저장해두는 다양한 장소와 시설이 존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창(漕倉)과 진창(鎭倉), 그리고 사창(社倉), 의창(義倉)과 같은 공공 곡물 저장 창고입니다.의창은 주로 국가에서 운영하였으며, 흉년이나 식량 부족 시 백성들에게 곡물을 빌려주거나 나누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에 사창은 마을 공동체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한 곡물 창고로, 주민들이 조금씩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거나 도와주는 목적이 있었습니다.또한 진창은 국경 지역이나 요충지에 설치되어 군량미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임시로 저장하는 조창은 한강 주변이나 큰 하천가에 설치되어, 나중에 한양으로 운반하기 전까지 곡물을 보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Q.  기원전후로 제국주의가 가장 강했던 나라는 어디이고 어느정도 집권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가장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했던 국가는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입니다. 이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이 분리되어 형성된 국가로, 서기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정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적인 정치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 약 1,123년 동안 존속하였습니다.비잔틴 제국은 단순히 오랜 시간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정치적 변화를 견뎌내며 고대와 중세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법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럽 법제도 형성에 기여했고,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로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비잔틴 제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제국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Q.  송나라때는 왜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경제와 문화가 매우 발달했던 시기였지만, 식민지를 만들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먼저, 송나라는 군사력이 비교적 약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초기에 군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강화하면서, 군사적 확장보다는 내정 안정과 행정 체계 강화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북방의 거란, 서하, 금과 같은 강력한 유목 민족과의 대립에서 수세에 몰리는 일이 많았고, 이로 인해 국외로 진출해 식민지를 건설할 만한 군사적 여유가 부족했습니다.또한, 송나라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발전했지만, 상업과 외교는 주로 교역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남송 시기에는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 지역까지 해상 무역을 활발히 전개했지만, 이는 영토 확장이나 군사 정복이 아닌 교역 중심의 평화적인 관계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송나라는 무역에서 얻는 이익과 기술적 교류를 중시했기 때문에 식민지 건설을 통해 자원을 착취할 필요성도 크지 않았습니다.마지막으로, 송나라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며 주변국은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굳이 외국을 정복하거나 지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외국과의 관계는 조공 체제와 무역을 통해 유지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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