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지폐에는 왜 역사적인 인물을 넣게 된건가요?
지폐와 동전에 역사적 인물을 넣는 것은 한 나라의 역사, 문화,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나 유물, 상징물을 넣음으로써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소속감을 심어주고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유명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화폐에 넣으면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이념, 업적, 변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Q. 미국의 독립 이후 13개 연방주들은 어떻게 국가 체계를 조직했나요?
1776년 13개 식미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각주가 독립적인 공화국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1781년 그들은 연합헌장을 채택해 느슨한 국가연합을 구성했으며, 각주는 강한 자치권을 유지하고 연합회의는 외교, 국방, 화폐 주조 등 제한된 권한만 가졌습니다.그리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연방헌법을 제정되어 중앙 정부와 주정부가 권력을 분담하는 연방제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현재의 미국 연방 정부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Q. 무신정권 초기,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주요 인물들의 권력 변동 과정과 각 인물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이의방은 1170년 무신 정변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이고를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등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던 중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피살됩니다. 정중부는 이의방 사후 실권을 장악하고 무신정권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중방을 중심으로 합의제 정치를 펼쳤으나, 점차 독재화되어 동료 무신들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1179년 경대승에게 제거당합니다. 경대승은 1179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약 4년간 집권했습니다. 도방이라는 사병 집단을 조직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으나 1183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의민은 노비 출신으로 경대승 사후 실권을 장악하고 최고 관직이 오릅니다. 신정권기 신분 변화의 대표적 사례로, 하층민 출신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드문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폭력과 강압, 사치 등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Q.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의 전개과정은 무엇인가요?
안시성 전투는 645년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하였습니다. 4월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본격적으로 침공했는데, 초반에 신성, 건안성,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하며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당군의 다음 목표인 안시성을 함락해야 했는데 실패한 것입니다.7월 21일 당군은 안시성 밖에서 포위하고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투석전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은 산지에 위치하여 무기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당군은 60일에 걸쳐 50만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토산이 무너져 오히려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하였습니다. 당군은 보급 문제과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지치기 시작하여 80일간의 포위전에서 고구려가 승리하게 됩니다. 승리 비결은 지리적 이점, 뛰어난 방어 전술, 단결과 사기, 당군의 보급 부족, 토산 붕괴와 역습 등이 승리 요인입니다.
Q. 우리나라 말이 훈민정음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훈민정음(1443년 창제, 1446년 반포)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문자 체계, 음운, 표기법, 문법, 어휘 등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자음 17자 모음 11자 총 28자였으나 현대에는 자음 14자, 모음 10자, 총 24자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자음 중 ㆆ, ㅿ, ㆁ, ㅸ 등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ㅿ(반치음)은 16세기 초까지 쓰이다가 소멸했고, ㆁ(옛이응)는 종성에서만 남았습니다. 또한 아래아(ㆍ)는 20세기 초까지 일부 방언(특히 제주도)에서 남아 있었으나, 표준어에서는 사라졌으며, 성조(방점)도 소멸했습니다. 그 밖에서도 이어적기에서 끊어적기로 변화되었습니다.
Q. 장보고가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장보고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말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였습니다. 신무왕(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 계열과 희강왕, 민애왕 계열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고, 김우징이 아버지가 패배하자 청해진으로 도주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장보고는 군사 5000명을 지원하여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무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나 즉위 180일만에 죽으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 뒤를 이은 아들 문성왕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장보고는 중앙에서 파견된 자격 염장에게 암살당하며 난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