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장보고가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장보고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말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였습니다. 신무왕(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 계열과 희강왕, 민애왕 계열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고, 김우징이 아버지가 패배하자 청해진으로 도주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장보고는 군사 5000명을 지원하여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무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나 즉위 180일만에 죽으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 뒤를 이은 아들 문성왕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장보고는 중앙에서 파견된 자격 염장에게 암살당하며 난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Q. 세종이 토지를 구분한 방식은 무엇이었나요?
세종은 1444년 공법을 제정하여 과전법 체제에서 조세 제도를 개편하였습니다.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법으로 나누고, 또다시 풍흉을 기준으로 연분 9등법으로 나누어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즉, 고려시대는 각 도를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하였으나 전분 6등으로 세분화한 것입니다. 1등전부터 6등전까지이며, 기준의 3등급보타 더 세분화된 것입니다.
Q. 우리말연구회가 해산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말연귀회는 아마도 '조선어학회'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조선어학회는 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확대 발전시킨 단체로 한글연구와 보급,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제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을 바탕으로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려 히였습니다. 그런데 1942년 함흥 영생여학교 학생이 기차에서 한글로 대화하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에 참여한 교사 정태진이 체포되는데, 이를 계기로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가지 회원과 관련 인물들을 대거 검거하였습니다. 내란죄 등으로 기소되어 치안유지법으로 고문과 옥중에서 사망한 이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해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Q. 발해는 외침에 어떻게 대비했으며 주요 전쟁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구려식 군사제도와 성곽, 정예병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수도 상경성에는 외성을 쌓고, 주요 도시에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주변 말갈 세력을 통제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결집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주요 전쟁으로는 무왕 시기 당의 산둥 반도의 등주를 공격하였으며, 이듬해 요서를 공략하였습니다. 발해는 흑수말갈 등 북방 유목 세력의 위협에 맞서 방어 태세를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