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명나라가 멸망하게된 이유는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명나라는 "당쟁(黨爭)"때문에 망했다. 어느 왕조이건 당쟁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당쟁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조정의 평형과 안정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쟁은 천하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통치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했다.둘째, 청나라는 "창위(廠衛)"때문에 망했다. 동창(東廠)과 금의위(錦衣衛)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탄생했다. 동창과 금의위는 영화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되지는 않았다. 창위는 그저 불법관리를 감독하고, 백성들은 전혀 해치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가 창위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웃기는 말이다.셋째, 명나라는 "환관전정(宦官專政)"때문에 망했다. 명나라때 환관이 권력을 독점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만력제 중기이후, 환관의 지위는 쇠락한다. 어떤 사람은 위충현(魏忠賢)을 얘기한다. 위충현은 확실히 발호했다. 그러나 천계제가 위충현을 기용한 것은 바로 동림당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위충현이 아무리 발호해도, 건곤은 천계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Q.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친족 용어가 발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친족에 대한 용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고, 또 같은 용어라 하여도 시대에 따라 그 의미내용이 변화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친족용어를 분석함으로써 친족의 범주 내지 친족조직의 특징 등을 알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의하여 살펴볼 측면은 부계친과 모계친, 처계친을 엄격하게 구별하였는가 하는 점과 만약 구별하였다면 그것은 언제부터이며, 그리고 하나의 조직 내지 집단으로서의 부계친(父系親)의 존재는 언제부터 뚜렷해졌는가 하는 점이다.그러나 170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제족(諸族)의 ‘족’이나 문족(門族)은 부계친만을 의미한다. 1700년대 이후부터 일반입양시에 입양상담대상자는 벌써 부계친만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입양협의대상자로서의 친족이나 문족이 부계친을 지칭하는 것은 명백하다.한편, 17세기 후기에 나타나는 소족(疏族) · 소원족(疏遠族) · 원족(遠族)은 부계의 원친(遠親)을 의미하고 근족(近族)은 부계의 근친을 나타낸다.
Q.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셰익스피어 당시에만 해도 영국에서는 공문서나 학술서를 라틴어로 작성했고, 심지어 최초의 ‘영어 문법책’조차도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1611년에 간행된 ‘흠정역 성서’(킹 제임스 성서)와 함께 영어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셰익스피어는 ‘신조어’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는 약 2만 개인데 그중 신조어가 약 2천 개에 달한다. “가령 우리가 입만 열었다 하면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는 신조어라고 생각해 보라.” 빌 브라이슨의 말은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천재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준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갖가지 표현은 오늘날 영어에서 관용어구로 자리잡았다. 가령 “살과 피”(flesh and blood, 혈육), “마음의 눈”(in the mind's eye, 기억), “더러운 행실”(foul play, 반칙) 등이 그렇고, “지나간 것들의 기억”(remembrance of things past)과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각각 마르셀 프루스트와 윌리엄 포크너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제목으로도 쓰여 더욱 유명해졌다(물론 프루스트의 소설의 영어 제목은 이제 프랑스어 원제에 더 가까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In search of lost time)로 대체되었지만).
Q. 인도의 카주라호 사원은 누굴 위한 사원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주라호 기념물군은 섬세한 건축 양식과 생명력 넘치는 성적인 조각품으로 구성된 독특한 예술 유적이다. 사원에는 다채로운 신화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종교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해괴망측한 표현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카주라호 사원들은 1202년 이슬람교도의 침입 전까지 인도에서 번창한 찬델라 문화를 증명하는 탁월한 유적이다.카주라호 기념물군은 섬세한 건축 양식과 생명력 넘치는 성적인 조각품들로 구성된 독특한 예술 유적이다. 사원에는 다채로운 신화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종교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해괴망측한 표현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카주라호는 10세기 초에 이 지역을 통치한 라지푸트(Rajput) 일족의 힌두 왕조인 찬델라의 원래 수도였다. 카주라호 사원들은 950년〜1050년까지 1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찬델라 왕조는 카주라호 일대에 사원을 85개 축조하였지만, 지금은 약 6㎢의 지역에 22개만 남아 있다. 1335년 이곳을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곳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난다.”카주라호 사원의 기념비들은 지리적인 특성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이들은 모두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유적에 속한다. 모든 사원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다양한 부조들이 장하(jangha, 벽)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높은 기단 위로 솟은 본당은 기단과 수직을 이루어 사원의 높이를 한층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내부는 대부분 같은 구조이며, 입구에서 작은 홀을 통해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본당의 지붕은 처마 끝을 여러 층으로 높이 쌓아 올린 시카라(Sikharas, 산봉우리) 형태이다. 신성한 성역은 가장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다.954년에 야소바르만(Yasovarman) 왕이 세운 락슈마나 사원은 비슈누(Vishnu) 신을 모시는 곳이다. 이곳에는 찬델라 왕조의 권력과 위엄을 재현한 듯한 정밀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비슈바나타와 파르슈바나타, 바이드야나타 사원은 야소바르만의 계승자인 당가(Dhanga) 왕 시대에 건립되었다. 자가담비 사원과 치트라굽타 사원은 카주라호의 서쪽 사원 그룹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칸다리야 마하데바 사원은 카주라호의 서부 사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며, 예술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완벽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간다 왕(Ganda, 1017〜1029) 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