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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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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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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7일 작성 됨
Q.
고구려 고국천왕이 우씨 왕후의 친척들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고구려 역사는 사료가 부족하여 많은 부분을 행간을 통한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고국천왕은 귀족들의 연합체인 오부체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때문에 초기 고구려를 공화정으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고국천왕의 전대인 신대왕은 연나부의 명립답부의 반정 덕분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명립답부는 현명하고 공평한 재상이었으나 그의 사후 연나부는 막대해진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권력을 가지고 다음 왕인 고국천왕의 왕비로 연나부의 수장 우소의 딸을 밀어넣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이런 외척의 전횡을 줄이고 왕권중심의 정책을 추진하려 노력해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후로 연나부의 전횡은 계속되었고 190년(고국천왕 12) 9월에는 연나부 출신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이 반란을 진압한 고국천왕은 귀족 중심의 오부체제를 지방과 행정구역 중심의 동서남북중앙부로 바꾸고 능력 위주의 인재들을 발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발탁한 인물이 안류였습니다. 하지만 안류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겸양하며 서압록곡 출신의 을파소를 추천하게 됩니다. 이 을파소가 우리 민족 최초의 구휼제도인 진대법을 설계한 인물입니다.최근 모 드라마에서 우씨 왕후를 영웅시하는 것은 그저 역사왜곡에 불과하니 그저 재미로 보시면 될 듯 합니다.
2024년 9월 7일 작성 됨
Q.
역사적으로 암살시도시에는 다리를 장소로 잘 활용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속담에 '원수는 외다리 나무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고가도 못하고 끝장을 봐야하는 상황에서 원수를 만나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다른 곳에서는 일격에 암살을 성공하지 못하면 어디든 달아날 구멍이 있지만 다리는 공간도 협소할 뿐더러 앞뒤를 막으면 다리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은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암살장소로 다리를 많이 활용했습니다.
2024년 9월 7일 작성 됨
Q.
하여가와 단심가의 시조는 실제 오간내용이라기보다는 나중에 만들어진 회자가 높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하여가와 단심가는 고려 충신 정몽주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이성계의 아들이자 최측근인 이방원이 자신들의 속마음을 내보인 시들로 유명합니다. 이런 의미있는 역사적 배경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매무 문학적 소양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그럼 과연 둘 사이에 은밀한 대화와 시조가 후세에 전해졌을까 하는 점인데, 저런 만남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살해된 정몽주에게서 나왔을리는 없고 이방원이 후에 아버지이자 주군인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부득이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내막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저런 시를 서로 주고받았다라고 해명한 것을 주변(사관등등)에서 듣고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2024년 9월 7일 작성 됨
Q.
정몽주는 왜 끝까지 고려라는 끈을 놓지 않았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자 문인으로 이성계와 매우 깊은 친분을 나눴습니다.이성계는 고려말기에 활약한 무인으로 남으로는 왜구, 북으로는 홍건적과 여진족등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문으로는 정몽주, 무로는 이성계가 어려운 고려를 지탱했다고 봐야할 것이고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이런 두 사람이 교분을 나누며 서로를 깊이 존경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하지만 이성계가 명나라 정벌 문제를 두고 결국 철군하여 위화도 회군으로 개성을 함락시키자 둘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정몽주는 물론 이성계를 존경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충신이라는 하나의 같은 틀안에서 가능했고 그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뜻을 알게 되자 결국 함께 할수는 없음을 내비췄습니다.하지만 이성계는 그렇게 영향력이 큰 정몽주를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차마 죽이지는 못했는데 이방원은 냉정하게 새로운 왕조에 정몽주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선죽교에서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며 이방원을 원망했다고 전해집니다.
2024년 9월 7일 작성 됨
Q.
선죽교는 원래 선지교인데 왜 선죽교로 바뀐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선지교에서 선죽교로 다리 이름이 바뀐 것은 정몽주의 죽음때문이라는 야사가 있습니다.그가 철퇴를 맞아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피를 흘린 자리에 대나무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때문에 이를 기리고자 사람들이 대나무(죽)자를 써서 선죽교로 다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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