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한국에 최초로 설립된 병원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하시는 병원은 아마도 한의원 같은 곳이 아니라 근대식 병원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대한민국의 근대식 병원의 시초는 1885년에 미국인 의사 알렌(마이애미 의과대학 출신의 의료선교사)에게 명성황후가 지어준 입니다. 급진개화파의 우정국 거사 때 민씨 가문 형제가 많이 다쳤는데 신의술로 고쳐내는 것을 보고 놀라고 감사한 마음으로 짓게하여 알렌을 교수이자 의사로 진료를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진료과목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고 종합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광혜원은 얼마 후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합니다. 하지만 국가 재정 부족으로 인해 문을 닫고 맙니다. 이후 민간에서는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간판을 걸고 민간병원으로 운영되었고, 향후 세브란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은 근대병원의 효시는 자신들이라고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측에서 주장합니다. 그런데 1899년 국가가 주도하여 다시 제중원이라는 이름이 아닌 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이 다시 문을 열게 됩니다. 이후 1908년 수도에는 이라는 이름으로 지방에는 1910년에 이 설립됩니다. 이후 대한의원은 경성대 의대가 되고 이후 이 됩니다. 그래서 국가 주도의 국립병원이었던 광혜원에서 제중원이었다가 문을 닫고, 다시 광제원, 대한의원, 경성의대를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병원으로 발전하였기에 서울대학교병원이 근대병원의 효시라고 서울대학교 병원 측에서 주장합니다. 두 병원 간의 원조 전쟁은 아마도 자존심 싸움인 듯 합니다. 두 측 다 주장하는 논리의 명분은 있으니 그냥 근대식 병원의 효시는 처음 건립된 으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고, 서울대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은 그 가지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Q. 알래스카가 왜 미국땅이 된걸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알래스카는 원주민 언어로 ‘위대한 땅’이란 뜻입니다. 1860년대에 러시아는 알래스카 영유권을 지탱하기 위해 소수의 러시아인은 강제로 정착시켰습니다. 러시아는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의 세 대륙에 광대한 영토를 보유했지만, 북아메리카의 알래스카에는 사실상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고 인근에는 적대국인 영국령 캐나다가 있었고, 그 남쪽에는 미국이 고속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크림전쟁 직후에 패전에 따른 재정 위기에 빠져 있었고, 농민반란 등이 있어 러시아는 당장에 돈이 급했기에 통치하기 어려운 알래스카를 경쟁입찰에 붙여 팔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 매각 협상 대상으로 영국과 미국을 선택했던 것입니다.영국도 마찬가지로 전쟁 후유증과 재정악화로 무리한 투자라고 판단하여 거절하였습니다.러시아는 방향을 바꿔 미국에 제의했지만 남북전쟁 이후 전쟁 복구 사업에 나라의 전 재원을 투입할 상황이어서 알래스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러시아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리히텐슈타인 공작에게 제의를 했지만 이도 거절 당했습니다. 알래스카 매각이 실패하고 내부에서는 그냥 보유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콘스탄틴 대공이 힘이 커지고 있는 미국이 북미 대륙 전체에 욕심을 보이고 있는데 러시아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알래스카까지 빼앗는다면 돌려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편지를 외무대신에게 보냈고, 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 해군장관도 동조하여 그냥 알래스카에서 철수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주미 대사였던 에두아르트 스테클은 그냥 철수하는 것보다는 몇 푼이라도 받고 팔자는 의견을 다시 제시했고 결국 매각으로 방향이 재정립되었습니다. 주미 대사인 스테클은 미 고위층과 접촉하여 매각 금액을 협상하였고, 미국은 사기 싫어 그냥 500만 달러를 넘으면 안된다고 어이없는 가격을 제시하였습니다. 협상 하는 과정에 1865년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이 되고, 윌리엄 슈어드가 국무장관이 되면서 슈어드 국무장관이 스테클 주미 대사와 재협상을 하였고, 1867년 3월 30일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 매각 협상이 타결됩니다. 최종 협상안은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며, 1867년 10월 18일 알래스카는 최종적으로 미국령이 됩니다.
Q.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 속의 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한가지 잣대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봅니다.각 인물마다 공&과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인물을 평가하는 사람들 각각의 판단에 있어 애국자가 되기도 하고 매국노가 되기도 합니다.이승만이라는 인물은 더더욱 그러한 여러 시각에서 존경하기 힘들기도 하고 존경할 수도 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고 봅니다.먼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정말 존경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1. 자신의 출세와 대한민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평가가 있음 (미CIA 문서)- 독립운동 하던 당시 한인사회 모금액으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의 상환을 국민회에 넘겼다. 그리고 그 대출금의 사용 내역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나 이것은 하와이 부동산 거래 기록 등을 볼 때 외히려 학교 건립 등에 재정을 보태었지 유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음- CIA 문서 서두에 애국자라고 평가하고 있고, 문서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승만을 반공주의자이자 애국자로 평가2. 한일합방의 단초를 마련했던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추진하게 한 미국인 스티븐슨을 민족의 원수로 저격 살해한 독립운동가 장인환 전명운의 변호를 큰 돈을 요구하면서, 결국에 살인자라며 변호를 거부했다는 설3. 일본의 이즈모함 폭파 공작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이승만이 직접 고발했다.그리고 하와이 법원에서 이를 증언4. 임시정부 대통령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를 넘으면 불법이므로 기소되었다?- 둘은 아버지와 딸과 같은 관계고 실제로 수양딸로 친권을 포기하는 여자측 부모의 친필 서류도 있다하니 확인이 필요하고, 수사는 받았으나 내용이 신빙성 없다는 판단으로 기소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어 확인 필요.5. 제주 4. 3, 여수순천, 보도연맹사건에서 민간인 학살에 국가 원수로서 분명 책임이 있음6. 사사오입이라는 궤변으로 독재 장기 집권하다가 결국 4.19 의거를 통해 실각. 독재의 책임이 있음.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1. 농지개혁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유상매입, 유상배분)2, 이승만 Line 설정을 통해 처음으로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명확하게 규정3. 6년 교육 의무교육제 신설로 문맹률 감소에 기여4. 한미상호방호 조약 체결로 인한 미국이라는 방어막 도입. 북한과의 전쟁 억제 효과최근 건국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승만에 대해 재평가 한다고 하는데 그동안 워낙 부정적인 평가 만을 받아오다 보니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쪽에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만 분명 공이 있는 대통령이지만, 과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었기에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습니다.어떤 독립운동가들은 분단 이후 되려 6.25 전쟁 때 김일성과 함께 대한민국을 침탈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을 하기 전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살인을 저질러 도망자 신분이었던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두운 면이 있었을 지 모르나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로는 박수를 보냅니다.마찬가지로 이승만이 그의 권력욕이든 아니든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초기 정부 확립에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욕심이 과했기에 독재로 장기 집권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다 결국은 쫓겨나게 된 것이죠. 이후 박정희의 군사 정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많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박수 받았으나, 자유를 억압하고 마찬가지로 독재 정권을 이어가며, 결국에 자신의 수하에게 암살 당하게 되었고, 또다른 군사 독재 정권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되었기에 후대에는 그의 과가 더욱 비판 받게 된 것입니다.그들은 야누스입니다. 어쩌면 정치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죠. 어떤 것이 진정한 그들의 얼굴인지는 지나온 역사를 보며 각자가 판단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Q. 우리나라의 세배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배 문화는 매년 초 한해의 무사와 풍요를 빌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그러한 제천의식에 대한 개념이 사람으로 옮아가 효의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에 처음에는 세배라는 것이 마을 또는 집안의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한해를 무사히 보내고, 맞이 한 한해에도 무병장수하시기를 비는 취지에서 문안인사로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집에 방문한 손님에 대해서 식사 또는 다과를 대접하였습니다. 세뱃돈에 대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에서 송나라 때 새해에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에게 홍바오라고 하여 붉은 봉투에 돈을 넣어 주며 덕담을 하는 궁시파차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져서 오도시다마라는 것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세뱃돈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압세전이라고 하여 '세'는 잡스러운 귀신을 뜻하는데 잡스러운 귀신을 누르는 것으로 새해 아이들에게 건내 준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여인들은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집안의 노비를 시켜, 다른 일가 친척에게 새해에 안부를 묻게 하였고, 안부인사를 받은 집에서 그 하인에게 수고비를 주었는데 그것을 문안비라고 하였고, 이것이 세뱃돈으로 확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해외와 무역을 많이 했던 시절은 고려시대라고 들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어떤 나라와 무역을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는 육로 및 해상을 통한 국제무역이 활발했습니다. 특히 중국의 송나라, 거란, 여진과 아라비아, 일본과의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송나라, 일본, 아랍국은 해상무역을 주로 하였고, 거란과 여진은 육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해상무역은 대부분 국제무역항이 된 벽란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송나라, 아라비아와의 무역에서는 주로 수출하는 품목은 금, 은, 나전칠기, 종이, 인삼 등이었고, 수입하는 품목은 비단, 향료, 서적, 수은 등이었습니다. 거란과 여진에는 주로 곡식, 철제, 구리, 농기구 등을 수출하였고, 모피, 말, 은을 수입하였습니다.공무역, 사무역 모두 성행하였으나 가장 중심이 된 것은 공무역이었습니다. 각국의 사신을 통해서 공식적인 루트로 들여왔습니다. 거래의 형태는 대부분이 물물교환의 형태였고, 간혹 중국화폐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공무역의 경우 조정의 관리들 중 해당국의 말과 글에 능통한 이가 사신으로 갔었기에 당연히 외교관으로서 소통이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되고, 사무역의 경우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실전에서 말을 배운 이들이 더러 있어 통역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이태원의 노점상 할머니들도 거래하는 영어는 아주 능숙하게 잘 하시는 것만 봐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Q. 중국의 한족하고 거란족하고 같은민족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 혼혈 민족입니다. 거란족은 동호계 선비, 흉노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으로 4세기경에 독립된 하나의 집단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퉁구스와 몽골계의 혼혈족입니다. 한족은 황하 중하류인 화북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현재 중국과 대만 인구의 대부분 차지 합니다.화하족이 원류이며 자신들의 기원이 한나라 때부터라고 말하며, 그들은 선비족과 몽골계의 혼혈족입니다.한줄기 씩은 다 섞여있습니다. 과거 정치적으로는 다른 국가이고 말도 달랐으므로 다른 민족이라 볼 수 있으나 과거 지배, 동화, 분화된 것으로 혼혈되어 형성된 민족이므로 일부는 동족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확실히 다른 것은 한좈은 농경 중심이고 거란족은 유목 중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