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장상돈 전문가입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전문가입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장상돈 전문가
산림일자리발전소
Q.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탄절(聖誕節, Christmas)이 이승만정부에 의해서 지정된 것은 1949년이지만,우리나라에 미군정이 실시된 1945년 10월, 일본 총독부가 정한 공휴일과 축제일을 모두 폐지하고,크리스마스를 관공서의 공휴일로 포고합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포고령을 이어, 1949년 6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제124호)을 반포하고,법적 정식 명칭으로 '기독탄신일'이라고 했다는 군요.우리나라에서 석가탄신일이 법정 공휴일이 된 것은 1975년 1월 27일 대통령령으로 지정했네요.그런데 석가탄실일이 법정 공휴일이 된 것은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소송을 통해 이루어졌군요.석탄일을 공휴일로 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끝에 지금의 법정공휴일로 자리잡게 됐다고 합니다. 법조계 기인으로 알려진 고(故) 용태영(고시 8회)변호사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1973년 직접 총무처장관인 심흥선 장관을 상대로 '석가탄신일 공휴권 등 확인 청구의 소'를 제기했는데, 예수탄신일인 12월 25일이 공휴일인 것과 같이 석가탄신일인 음력 4월 8일도 공휴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공휴일로 지정, 공포해달라는 취지였다고 합니다.이 소송은 11차 변론까지 진행된 끝에 1974년 각하됐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행정청의 일차적 판단을 기다려 보지 않고 그의 부작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새로운 행정처분을 명하거나 이에 갈음할 재판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이 안 된다"며 "불교계의 진정에 대해 행정당국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는 것만으로 그 공휴일 지정을 거부한 행정처분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네요. 또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는 것이 위법 상태라는 확인을 구하고 이를 공휴일로 지정할 것을 명하는 판결을 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도 했답니다. 용 변호사의 청구가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해 적법하지 않아 각하한다는 취지였고, 그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했습니다.이렇게 소송이 진행되면서, 불자들의 관심이 높아져, 여론이 형성되었고,대법원에 상고심이 계류중인 상태에서 1975년 1월, 국무회의에서 '석가탄신일의 공휴일 지정의 건'이 통과되어 법정공휴일이 되었습니다.이 분은 2007년 조계사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에서 '올해의 불자대상'을 수상하셨네요. 만약 국회나 대통령령으로 지정하게 된다면, 다른 종교의 특별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기독탄신일,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정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우리나라 역사의 과정 중에 생겨난 것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Q.  김구 선생과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범 김구선생이 자신의 이름을 구로 바꾸게된 계기가 된 사건이죠.105인사건, 안명근사건, 안악사건으로 불리는 일제의 조선민족문화말살을 위한 날조된 사건으로 새로 부임할 데라우치총독 암살계획이라고 하여1910년부터 1911년까지 160명을 검거하고 고문하여 날조된 강도, 내란, 살인미수 등의 죄목으로 재판한 사건이네요.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을 일제가 부풀려 안명근은 무기, 김구는 15년 구형했네요.김구선생은 감형되어 출소하기 전 이름을 바꾸셨네요.백범이라는 호도 이때 지으셨군요.변절하지 않겠다고 구.하층민이라도 독립정신을 모두 갖도록 해야된다고 백범.
Q.  금리 인상과 원화 가치의 관계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시중 금리가 미국 금리인상분만큼 따라 올랐습니다.미국에 있는 은행이 달러를 맡기면 이자를 많이 주고,한국에 있는 은행이 원화를 맡기면 미국 은행보다 이자를 적게 준다고 생각하면,당연히 한국에 있는 은행에 돈을 맡겼던 예금주는 원화를 빼내 달러로 바꾸어 미국은행에 예금하겠죠.그러니 한국에 있는 은행도 미국에 있는 은행의 이자만큼 따라가 줘야하는 것입니다.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인상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데요.엔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죠.반대로 우리나라는 금리를 인상해 원화와 달러 환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겠죠.그런데 질문자님이 시중금리가 오르는 추세가 원화의 국내가치를 떨어뜨리는 것과 관계가 있느냐고 하셨는데,국내 원화의 가치는 국내 인플레이션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물건 값이 오르면, 원화의 동일한 가치로 더 적은 양의 동질의 물건을 살 수 밖에 없으니, 돈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그러나 시중금리가 오르면 환율방어가 되기때문에, 환율에서는 오히려 원화로 살 수 있는 달러의 양이 많아지겠죠.물론 미국이 올리는 금리만큼 동일하게 우리나라 은행의 금리를 올린다면 환율의 변화는 없겠죠.만약 미국보다 시중금리를 더 올린다면, 그것은 환율에서 원화의 가치가 높아질 것입니다.질문자님이 환율을 묻는 것이 아니고, 물가를 묻는 것이라면,국내 원화 가치는 물가가 올라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Q.  우리나라 전통중 두레나 계등이 있는더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두레는 마을에서 농삿일이 많을 때, 15명, 또는 55명 정도까지의 일군이 함께 일하는 것이었습니다.두레에 참여하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인정받아 두레의 일원이 되고, 탈퇴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두레 관리자 행수, 행수를 돕는 도감, 작업지휘 숫총각, 감시하는 조사총각, 회계를 맡은 유사의 역할이 있었습니다.품앗이는 집끼리 작은 일들을 함께 처리해 주는 것이었죠.계는 돈, 쌀, 곡식, 등의 물품을 조금씩 각각 내는데, 그 모은 양을 모두 순서를 정해서 가져가는 것인데요.이 계가 활발해져, 조선 전기에 향약이라는 것이 교육되었는데요.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된 일은 서로 벌준다.예속상교(禮俗相交) - 좋은 풍속은 서로 나눈다.환난상휼(患難相恤) -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공굴은 마을 안에 불구자, 과부, 초상 당한 사람의 농사를 같은 마을 사람들이 지어주는 제도입니다.공굴은 무보수봉사가 원칙입니다.사창이라는 것도 있는데 촌락을 기반으로 구황 시설의 성격을 띤 곡물 대여 기관입니다. 민간 자치적 성격을 띤 일종의 빈민 구호제도입니다.그런데 사회복지제도는 우리나라의 국가제도 중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상평창과 의창, 구황, 동서대비원, 혜민국같은 것이 있었고,이런 국가제도를 사회복지제도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민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두레, 계보다는 국가제도를 더 우선 관찰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정부주도하에 지역사회복지관의 설립이 1980년대에 시작되었으므로,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인보관운동(Settlement House Movement)로 봐야하지 않을까요?1884년 Samuel Barnet목사가 런던 이스트 엔드 지역에 세운 토인비 홀이 세계 최초 사회복지관이며,1889년 미국 시카고에 두번째 인보관이 세워지는 데, 인보관운동은 국가제도가 아닌 개인에 의해 진행된 사회개혁운동이고,미국도 사회보장법이 제정된 것은 1935년이었습니다.
Q.  삼국지 시기에 우리나라는 어떤 시대였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정사로 인정하는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가 3세기에 쓰고, 남조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역사서로, 30권, 15권, 20권, 합계 65권으로 남아있다네요. 질문자님이 말씀하시는 소설 삼국지는 14세기의 중국인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通俗演義가 정식 명칭)는 삼국지를 토대로 역사소설이라는 군요. 소설이기때문에 정사인 삼국지와 삼국통속연의는 다른 내용이 많다고 합니다.우리나라 한반도는 그 시기에 어떤 상황이었을까요?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오나라 멸망까지 100년을 다루었다고 본다면,진대법과 장자상속제를 마련한 9대 고국천왕을 비롯해,고구려 10대 산상왕(197년 즉위), 11대 동천왕(227년 즉위), 12대 중천왕(248년 즉위)이 이 시기겠죠.고구려 왕들 중에, 동천왕과 중천왕은 삼국통속연의 속, 인물들과 전쟁을 벌였군요.오나라 손권은 북쪽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요동의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었으나 공손연이 사신들의 목을 베었네요.고구려의 동천왕은 살아남은 오나라의 사신을 거두고 오나라 손권과 동맹을 맺었군요.234년, 동천왕은 오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았는데, 4년 뒤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씨 정권을 멸망시켰고,이에 고구려 동천왕은 위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군요.요동반도를 차지하려고 동천왕이 먼저 위나라를 치고 올라갔군요.242년 요동의 서안평 지역을 먼저 공격했지만, 차지하지는 못했군요.246년 위나라가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한 차례 승기를 잡았으나, 그 다음 전투에서 참패해 수도 환도성도 잃고 남옥저로 도망했군요.다시 환도성을 찾기는 했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후였네요.그 아들 12대 중천왕은 13년 뒤인 259년에 위나라를 상대로 승전했다고 합니다.이렇게 이 시기의 역사적 기록이 있고, 265년 조조의 손자, 조환은 사마담에게 왕위를 넘겼고, 사마담은 진나라를 세우고 낙양을 수도로 정했네요.
2627282930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