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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Q.  춘생문 사건은 어떠한 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춘생문사건은 을미사변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던 국왕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다.이 사건으로 체포된 임최수 · 이도철은 사형, 이민굉 · 이충구 등은 종신유배형, 이재순 · 안경수 · 김재풍 · 남만리 등은 태(笞) 100,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 한편, 거사가 실패하자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측은 이 ‘국왕탈취사건’에 서양인이 직접 ·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였다.그리고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세력인 정동파는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켜 일시적이나마 일본세력을 물러나게 하였다.
Q.  조선시대때 예조는 어떤 일을 하던 곳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조는 육조 가운데 하나로, 예의 및 음악과 제사 및 연회와 외교, 교육과 과거에 대한 사항을 담당한다.오늘날에는 교육부, 외교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예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Q.  사우디가 몇년전부터 미국와 서서히 유대관계가 약해지는 원인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부터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어요. 바이든 행정부가 ‘인권’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면서, 취임 직후 사우디를 ‘인권 탄압 국가’라고 비판했기 때문이죠.이후 무서운 물가 상승세에 바이든 대통령이 잠시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오히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더 멀어졌어요. 물가 안정을 위해 기름값이 하락하길 원하는 바이든이 사우디에 직접 찾아가면서까지 ‘생산량을 늘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사우디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거든요.바이든 대통령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해 10월 산유국 모임인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는 대규모 감산을 결정했어요. 사우디가 이 결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미국 입장에선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죠. 바이든 대통령은 “근시안적인 결정”이라는 비판을 쏟아냈어요.이때부터 양국 사이 파열음은 점점 커졌어요. 미국 정부는 77년 동안 공고했던 전략적 동맹 관계를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했고, 무기 수출은 물론 미국 기업의 사우디 현지 투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어요.사우디도 미국에 지지 않고 대응했어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회원국과 더 똘똘 뭉쳐 한목소리를 내면서, 중국·러시아와 더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죠. 사우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빈 살만) 왕세자는 브릭스(BRICS) 가입을 희망한다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어요.만약 사우디가 브릭스에 가입하거나 러시아·중국과의 관계가 더 끈끈해지면, 석유를 달러로만 거래하는 ‘페트로 달러’ 체계에도 균열이 갈 수 있어요. 그만큼 미국의 영향력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거죠. 사우디가 중국 화폐인 위안화 등 다른 화폐로 결제하는 걸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Q.  이란이 팔라비왕조의 미국이 망명을 받아준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리자 샤 팔라비에 대해 미국 정부는 췌장암 치료를 이유로 입국허가를 내줬습니다.
Q.  1980년대 이란이 미국대사관 점령시 헬기로 몰래 탈출시키려는 계획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란에 억류된 미국 대사관 직원을 구출하기 위해 1980년 4월 28일 미국이 감행한 군사작전(암호명 '독수리 발톱 작전')의 처참한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작전에 투입된 헬기 8대 중 2대가 갑자기 불어온 모래 폭풍으로 고장 나면서 작전이 시작부터 꼬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돌발변수가 없었어도 작전이 성공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실패의 원인은 더 근본적인 데에 있다는 것이다.첫째가 당시 미군에는 전략과 전술에 대한 육'해'공군 사이의 이견을 조정할 통합적 시스템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각 군의 국방 자원 획득 경쟁과 독립성 확보 요구를 통제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육'해'공군이 단일한 지휘체계 아래 조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수리 발톱 작전에는 각 군에서 전투부대뿐만 아니라 전술 통제팀과 후방 지원팀까지 여러 부대가 투입됐지만, 사전 훈련에서 한 번도 모든 부대가 참여하는 합동 훈련을 하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두 번째가 독수리 발톱 작전은 전형적인 특수전이었지만 당시 미군의 특수전 역량은 매우 저하돼 있었다는 점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승인으로 창설된 '그린베레'가 있었지만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한 뒤 그 존재 가치를 부정당했다. 여기에는 그린베레를 '암살' '만행' '고문'과 결부시킨 미국 국민의 혐오감도 한몫했다.그 결과 베트남전 이후 전군에 대한 구조조정에서 특수부대가 가장 크게 칼질을 당하면서 이란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기 1년 전인 1978년 특수부대와 특수작전 비행단의 전력은 1964년의 60%로 떨어졌다.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 일레인 카마르크) 결론적으로 독수리 발톱 작전의 실패는 미군의 총체적 역량 저하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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