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지미 카터대통령은 당시 인권을 중요시한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로널드 레이건과의 경선 끝에 승리한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후보로 내세웠다. 민주당은 의외의 인물을 내세웠는데 조지아 주 주지사 출신의 정치인 지미 카터였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덕과 인권의 중요성을 내세운 카터는 본인의 똑똑함과 성실함, 그리고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에 보여준 온화한 모습을 무기로 삼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카터의 승리였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카터는 키프로스 전쟁과 베트남의 공산화를 거치며 무너져 내린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고 끝이 안 보이는 불황 속에서 탈출할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대통령이 된 이후 카터는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 조지아 주에서의 흑백 차별을 철폐하고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노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등을 보장했던 카터답게 미국의 안팎으로 인권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고 비민주적인 국가에 철퇴를 내리는 데 집중했다. 카터의 인권 외교는 한국의 정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카터의 집권기에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독재를 펼치고 있었다. 1961년부터 이어진 독재와 이로 인한 인권의 탄압이라는 그림자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로 말미암은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빛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다. 카터 행정부 이전의 미국 행정부들은 박정희의 독재를 묵인했다. 그러나 카터는 박정희의 독재는 물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것까지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카터는 박정희 정권이 인권 문제의 개선에 나서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며 한국을 압박했다.
Q. 히틀러는 형편없는 무솔리니와 왜 손을 잡은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30년대 초만 하더라도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무솔리니를 선망하는 것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를 열렬히 추종했고 무솔리니의 정치 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 따지고 보면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수많은 파시즘 정당 중 하나에 불과했고 히틀러도 베니토 무솔리니 워너비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고자 이탈리아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고,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뮌헨 폭동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여하튼 베니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도 그를 '시골뜨기 듣보잡(히틀러와 가까워지기 전엔 사석에서 정신나간 미치광이 혹은 위험한 바보로 칭했다고 한다)' 정도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히틀러가 이것을 기회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하자,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초강경한 경고 전언을 날렸고 히틀러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희망은 4년 후인 1938년에야 안슐루스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무솔리니가 침략의 길을 걸으면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에티오피아 제국의 후신)을 수립하고 독일과 손을 잡은 뒤였다. 스트레사 동맹의 허울을 이용한 팽창주의 결과였던 것이다.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이런 애정은 훗날 전쟁이 진행되면서 무솔리니의 돌출 행동에 따른 짜증, 애증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런 관계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