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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Q.  우리나라의 한복은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복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는 고구려 벽화에서다. 기본 구조는 상의, 허리띠, 하의, 모자(또는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띠는 고름으로 간소화 되었으며 두건은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하였다. 이후 만주족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마고자와 서양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조끼를 추가하여 지금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현대 문화에 맞게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드는 등 일상 생활에서도 더욱 입기 편하도록 만든 형태이다.
Q.  왕규의 난은 어떠한 사건 이였는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43년에 고려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왕규는 광주(廣州)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大匡)까지 되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妃)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자로 있었다.그는 태조에게는 충성했으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하였다.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하였다.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 :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에는 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요는 945년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올랐다.
Q.  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대표적인 나라들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등 총 16개국 입니다.
Q.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어떤 지위와 권한을 가졌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이나 왕세자의 사위인 부마들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정1품에서 종2품까지 4종이 있었는데 각기 수록대부(綏祿大夫)·성록대부(成祿大夫)·광덕대부(光德大夫)·숭덕대부(崇德大夫)의 의빈계(儀賓階)가 주어졌다.부마들에게 내리는 최초의 작호는 왕의 적녀인 공주의 남편에게는 종1품의 위를, 서녀인 옹주의 남편에게는 종2품의 위를,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의 남편에게는 정3품 당상의 부위(副尉)를, 서녀인 현주(縣主)의 남편에게는 신분에 따라 정3품 당하 혹은 종3품의 첨위(僉尉)가 주어졌고, 여기에서 차차로 진급하게 하였다.이들 의빈은 국초에는 정치에 관여하였으나 태종대부터 정치에의 참여가 많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보장책으로 이러한 명예직의 작호와 토지·녹봉을 주었다. 위의 직명 앞에는 각기 그 의빈의 관향(貫鄕)을 붙여 작호를 정하도록 하였다.달성위(達城尉 : 서경주. 선조의 딸 정신옹주의 남편)·해숭위(海崇尉 : 윤신지. 정혜옹주의 남편)·청평위(靑平尉 : 심익현. 효종의 딸 숙명공주의 남편) 등이 그것이다.조선 초기에 제도가 정비되기 전에는 부마들에게도 부원군(府院君)·군(君) 등의 작호를 주었으나 1451년(문종 1)부터 작호를 위로 통일하고 1484년(성종 15) 위·부위·첨위의 체제로 정비되었다.부마들이 받는 의빈계는 조선 후기에 일반 문산계(文散階)에 통합되어『대전회통』에 법제화되고, 정1품만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로 통일하여 문산계와 구별하였다.
Q.  우리나라 최초의 일기예보는 언제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0년 일제강점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기상업무는 모두 일본인들이 관장하게 됨에 따라 일기예보도 일본인들이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모든 기상업무가 이관되어,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근대적인 일기예보를 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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