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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휴 미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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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휴 전문가
휴쿤스트
Q.  6.25전쟁에서 우리를 도와 준 나라 중 에티오피아는 어떤 이유로 참전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25전쟁은 시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전쟁으로 전체 나라 60개국이 피병지원을 했다고합니다. 이 나라들 중 대부분은 지유주의 편에 서서 전쟁이 끝나면 그 입지가 중요했기에 의무적 지원도 있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중 유일하게 순수한 자유평화를 위해 모인 파병입니다. 그만큼 에티오피아가 핍박을 받았었고 그런 이유로 참전을 하게됩니다. 그들은 월급을 모아 보화고아원을 지어 한국의 고아들을 전쟁이 끝나서도 보살피고 도왔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에티오피아는 얼마 지나지않아 사회주의가 승리하며 자유주의편에서 사회주의와 전쟁을 벌인 참전군인들을 모조리 겁탈하고 응징하게됩니다. 정말 안타까운일입니다.
Q.  서울의 옛 이름이 경성이었나요? 일본이지었나요?
안녕하세요. 김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인 1910년 10월 1일부터 8.15 광복 이후 경기도 서울시로 개칭되어 폐지된 1946년 8월 11일까지 만 35년 10개월 10일 간 존속한 경기도에 속한 옛 행정구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입니다. 일본어로는 게이조후(けいじょうふ)라고 했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한제국 수도였던 한성부! 대한제국 수도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가 발표됨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경기도청 직할 구역이 되었습니다. 비록 1910년부터 1946년까지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기는 하였지만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경성이란 표현은 수도(京)+성곽(城)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쓰였습니다. 경셩으로 표기했으며 이는 지명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서울'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서울'이란 이름도 이 경성의 직역 또는 그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경성(게이조)'이라는 이름이 일본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당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모습이 '京+城'로 개칭을 하는것을 당연시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은 일제가 강제로 한양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고 한양 일부(1936년 이후에는 여기에 근교 경기도 지역도 포함)를 하나로 묶어 '경성부'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이전 보통명사 '경성'과 일제강점기 고유명사 '경성'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알아야 할듯합니다.
Q.  히틀러의 가족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순수 민족'의 신화를 기반으로 세워진 히틀러의 나치 집단 안에서는 집안의 배경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총통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이란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외면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정작 총통의 집안은 수수께끼였습니다.하지만 밝혀진 바에 의하면 히틀러의 선조들은 우월한 나치 지배자 민족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느 집안 출신인지 알 길이 없다' 히틀러는 가족에 대해 숨길 것이 많았습니다.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는 중혼자였고 여동생 파울라는 대량 살인자와 약혼했습니다. 그의 조카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육촌 자매는 그의 심복에게 살해됐으며 조카 한 명은 치열했던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고 또 다른 조카는 히틀러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나치의 기준으로 보면 히틀러 집안의 뿌리는 꽤 의심스러웠습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혈통을 철저히 은폐했고 오늘날까지도 히틀러의 근친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하나씩 연결하고 있습니다.독재자는 순수한 혈통과 우월한 집안 배경에 집착했으나 정작 자신은 의심스럽고 문제가 있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히틀러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밝히기가 힘든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히틀러의 유일한 해결책은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대중들에게 숨기는 것이었을 겁니다. 총통은 가족사의 비밀을 대중들에게는 숨겼을지 몰라도 나치 비밀 경찰의 무서운 촉수를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1944년 1월 히틀러의 보좌관 마르틴 보르만은 SS 친위대장 하인리 힘러로부터 충격적인 문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총통의 친척들에 관한 기밀 정보였습니다. 힘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히틀러의 친척들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밝히고자 했고 게슈타포는 총통의 친척 몇 명을 찾아 그들을 '멍청한 정신병자들이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게슈타포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총통이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이 조사로 SS 친위대 요원들은 그라츠에 있는 파이트 가족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온갖 사진과 서류, 그리고 히틀러 부친의 사적인 편지까지 압수했습니다. 조사 결과는 정치적 폭탄과도 같았습니다. 파이트 가족은 아돌프 히틀러의 직계 친족으로 밝혀졌고 또한 이 집안에는 정신 질환 내력도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육촌인 알로이지아 파이트도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파이트 집안의 형제자매들도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이 가족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조들 중에도 정신 질환 징후를 보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가족에게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 기질이 있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습니다.
Q.  징기즈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하던 당시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몽골 제국 통치 시기에는 종교적 관용과 함께 인종의 평등을 지향하여 제국의 평화와 질서 유지는 동서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교역을 통해 몽골 제국은 부유했고 자연스럽게 과학과 문화예술도 함께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체제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문명·문화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비롯해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유목기마민족 문명, 불교 문명, 페르시아 문명, 이슬람 문명 등 동서고금의 주요 문명이 서로 교류되면서 일정부분 교차 융합되었습니다. 이른바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열매를 꽃피웠고, 이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동서교류를 관통하는 진정한 세계사의 산파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양성 인정과 문화의 차이점을 존중하는 몽골제국의 다원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전통적인 비단길을 기초로 몽골제국이 이룩한 초원길은 더욱 안전한 동서남북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로 이어졌고, 나아가 ‘대항해시대’의 바닷길도 열렸습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마르코 폴로의 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을 만큼 서양인의 눈으로 고증한 역사적인 여행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Q.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은 1811년~1817년에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입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한 방적기 기계가 노동자의 일거리를 줄인다는 생각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네드러드 라는 사람이 기계를 일부러 고장내어 알려진 운동으로 러드다이트라고 부릅니다. 러드라는 인물은 정확히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리잡아가던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요구하면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운동이었지만 동시에 산업화와 기계화라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을 거부하는 근시안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입니다. 러다이트 운동의 실패 이후 노동자들은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말 이 차티스트 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맞물려서 정치세력이 되어 영국 노동당이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한편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 중 하나였던 빈부격차와 실업 문제는 전체적인 생산성의 향상 보통선거 제도의 도입에 따른 노동권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확대가 맞물리면서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면적인 복지제도 도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도입되었지만 복지국가 수준은 아니었고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보통 선거에 의한 대중 민주주의와 산업시장에서의 효율성, 노동자의 권리확대를 절충하면서 발전해 기존의 소극적 야경국가의 정책에서 벗어나는 데는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간될 때까지 오랜 기간의 투쟁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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