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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영민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조영민 전문가입니다.

조영민 전문가
GA코리아
Q.  왕의 딸을 공주와 옹주라고 부르는데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 왕의 아들을 대군과 군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처럼 왕의 딸도 공주와 옹주로 구분하여 불렀습니다. 차이점은 어머니의 신분입니다. 왕후로부터 태어난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고 부르지만, 후궁(첩)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은 군, 딸은 옹주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정실부인인 왕후로부터 태어난 자식의 신분이 더 높을 수 밖에 없지요. 옹주나 군의 나이가 더 많다라고 해도 대군과 공주에게는 존칭을 사용했습니다.
Q.  종이접기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종이접기의 기원이 종이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당시 종이는 매우 귀한 재료였으며 문자를 기록하는 본래의 용도 이외에 물건을 포장하거나 의식(儀式)의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만약 이것을 종이접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을 의례(儀禮) 종이접기로 분류한다. 종이접기 역사 연구가들에 의하면 종이접기는 서양과 일본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19세기에 서로 만나 영향을 주고받은 후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종이접기의 흔적은 1680년 이하라 니시츠루가 읊은 '노제가 꾼 꿈의 나비는 오리스에'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스에는 오초·메초(숫나비·암나비)라 불리는 종이접기로, 결혼식 때 사용되었다. 서양의 경우 13세기 요하네스 데 사크로보스코가 쓴 천구론(天球論)의 삽화 중 종이배와 유사한 모양이 등장한다. 18세기 일본에서는 종이학이나 얏코산같은 전승종이접기가 등장하여 풍속화나 기모노에 삽입되었고, 19세기 유럽에서 기사나 말의 종이접기가 접혀진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19세기 중순 독일의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oebel)은 그의 교육법인 가베(GABE)의 제 15작업으로 종이접기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받아들여지면서 동서양의 전승종이접기가 하나로 융합되어 다시 전 세계로 퍼저나가게 된다.
Q.  후추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때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에는 1389년(공양왕 1)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후추는 수입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한 물품으로 취급되었죠~『징비록(懲毖錄)』에 수록된 후추의 일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후추를 선호하였고 귀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Q.  비너스 조각상의 팔은 왜 없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비너스는 양쪽 팔이 없습니다.제작 당시에는 팔이 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만발굴당시에 잘려졌다는 설과땅에 묻힐 당시 부러젔다는 설 등팔자세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의 자세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즉 한팔은 아래 치마선을 잡는 자세이고한팔은 구부려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는 자세일거란 추측이지요.
Q.  세계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도 전범국가로서 사과를 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독일이나 일본과는 달리 43년 말에 빠르게 항복했고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국민들이 직접 끌어내렸거든요 덕분에 완전한 패전국 취급을 받지 않고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특별상태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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