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제시대 교사들은 칼을 왜 차고다녔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선생님들이 칼까지 차고 수업해했냐고 물으셨는데, 사실 실질적인 이유는 총독이 그러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직원이 공무집행을 할 때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반드시 제복을 착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그렇다면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을까요? 이 시기는 이른바 무단통치시기라고 불리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자비하고 깅압적인 통치가 두드러지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인데요,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즉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강점 초반에 무서움과 두려움을 심어주며 강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치 정책의 한 단면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Q.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는 회화 작품이 없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와 신라에도 회화가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의 경우, 송산리 6호분의 벽화 사신도, 능산리고분의 벽화로 그려진 사신도 및 연화문, 무령왕릉의 어룡과 신수 문양, 부여군 외리에서 발견된 산수문전 등의 여러 문양전에서 백제 회화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벽이 없는 형태의 무덤 양식 때문에 벽화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천마총에서 출토된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채화판(아직 용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음)에 그려진 서조도, 기마인물도를 통해 신라 회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눈 채전(彩典)을 두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도화서처럼 왕실에서 필요한 그림이나 화가를 관장하는 관청일 것으로 짐작되어 회화 활동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아주 잘 그렸다는 솔거의 이야기 등 회화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남아 신라 회화의 희미한 모습을 짐작케 합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조선시대 왕의 어진을 그릴 수 있었던 화가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진을 제작하는 화가를 어용화사라고 불렀는데요, 어용화사는 당대 화가들 가운데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의 리스트를 대신들이 쭉 뽑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의논해서 선정하거나, 시재(試才)라고 하는 시험을 거쳐 결정했습니다. 예를들면 초본, 즉 스케치나 도안을 그려보게 시켜서 잘 하는 사람을 담당 관료가 선정하고, 왕 앞에 나아가 초본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보통은 도화서 화원들 중에서 초상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선정했으나, 조선 왕조에서 세 번, 1713년(숙종 39), 1748년(영조 24), 1900년(고종 37)에는 도화서 화원이 아닌 민간 화사를 뽑아 시재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용화사를 단 한명만 선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용안, 즉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얼굴 이외의 부위를 그리는 동참화원, 채색을 돕는 화채가 각기 따로 있었으며, 이들 역시 여러명을 뽑았기 때문에 총 6명에서 13명정도가 한 번에 어용화사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Q. 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고구려의 정세가 나빠지고 마침내 멸망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의문을 가지신 바와 같이 연개소문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사망 하나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우선, 고구려의 내부적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토지 황폐화나 많은 인구가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또 군사력도 저하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도 중흥할 수 있을지 말지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죽음은 나라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개소문 사망 후 연개소문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일어나 국가적인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연개소문이 구축해 놓은 강력한 왕권이 흐트러지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왕위다툼에서 실각한 연남생이라는 인물은 결국 당나라로 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연남생은 이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는 과정에서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한편, 단순히 연남생의 말만 듣고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외정세 또한 고구려의 멸망에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이 즈음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영토를 소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당나라에게 연합을 요청하였고,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계속 침공해 온 전적이 말해주듯 연합을 수락하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른바 나당연합이 결성된 뒤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668)시키며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