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을 못먹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950년대 즉 지금의 장년층은 어린시절에 쌀밥을 못 먹었던 시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당시에 쌀밥을 못먹고 다른 빵이나 기타 곡물류의 음식을 먹었던것인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농업 중심의 산업 구조로 인해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쌀밥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혼분식장려운동은 대한민국에서 시행한 것으로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정책이 펼쳐진 이유는 주식인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베이비 붐 등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나 쌀의 생산량은 이를 미처 따라가지 못했고 이는 쌀 부족현상 및 쌀값 상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부에서는 토지 개간 및 간척, 신 품종 개량 및 농법 개선 등을 시행하나 이는 중장기적인 대책으로 단기적인 부족현상을 해결하기 힘들었으므로, 정부는 쌀 소비를 줄이는 방안 또한 찾아야 했는데, 마침 미국에서 밀가루나 옥수수를 대량 원조해 이를 이용하게됩니다.
또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 계획으로 박정희 정부는 수출 지향의 공업화와 저임금 정책을 펼쳤고, 저임금을 통해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생활이 가능해야 했으므로, 쌀 소비를 줄여 쌀값을 낮추고 이를 통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비교적 공급량이 많던 보리를 비롯한 잡곡, 미국의 지원으로 많이 풀려있던 밀을 쌀의 대안으로 국민들에게 제시, 이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분식 소비 증가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좌우익 간의 갈등이 고조된 상태에서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 되버렸고 우리는 국제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빈국으로 추락하였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밀을 수입하여 빵을 만들어 배급을 하였고 보리농사로 연명해야만 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산업발전과 함께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개혁과 변화를 추구하고 통일벼 등 식량증산운동으로 쌀 생산량을 늘렸고 쌀의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도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노동자들의 저임금 정책이 있었고 그 노동자들을 위해 저곡가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즘이야 쌀이 흔하고 잡곡이 비싸져서 거의 흰 쌀밥으로 짓지만, 1950년대는 물론 이거니와 60년대 까지만 해도 쌀의 공급이 부족해 쌀밥은 귀했고 대부분 잡곡을 절반 정도 섞은 밥이었습니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잡곡에 쌀을 약간 넣은 수준이었고 그 이전에는 그것도 없어 조밥이나 멀건 보리죽을 먹었었고,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는 쌀이 다른 지역보다도 더 귀해서 수수나 옥수수 강냉이로 밥을 대체했고 본격적으로 쌀을 맛본 것은 6.25 전쟁 이후로 원조로 들어온 안남미가 보급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국내 쌀 생산량이 소모량을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1960~1980년대에는 혼식을 강제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복 직후 분단과 미군정의 실수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했습니다. 또한 6. 25 전쟁으로 경지가 황폐화되어 식량 사정이 원활하지 못하였고,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원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원조로 제공되는 밀가루로 가공한 식품이 쌀을 대신해 분식이 장려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쌀의 품종이 현재의 품종과 비교해 수확량에 작고, 병충해에 취약했습니다. 게다가 수로 및 저수지 등 관개시설이 부족하여 농사 조건이 열악했습니다. 1970년대 통일벼라는 신풍종이 개발하고, 간척 및 관개 시설이 개설되기까지 우리나라는 쌀이 흔한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