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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8.17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현재 보존이 되었나요?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하는 염원으로 국가주도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그동안 원의 공격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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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것은 경판의 안정성 외에 경판에 옻칠을 하거나 환풍, 습도, 온도 등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독특한 장경각의 위치와 경판의 배열 등은 물론 간행 후에 경판을 깨끗이 닦는 등 목판 보존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불가사한 건축물 중 하나인 해인사 장경각은 목판 보관에 필요한 온도, 습도, 통기 등의 균형이 이상적으로 되어 있다고합니다. 장경각의 지하에는 다량의 숯과 소금이 묻혀 있었다고 합니다. 숯을 깔면서 소금을 뿌리는 방법으로 기초를 다졌으며, 숯 1g의 표면적은 약 3백m2로 무수한 구멍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구멍들은 수분을 저장하고 공급하는 힘이 무척 크기 때문에

    장경각의 수분을 조절하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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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하는 염원으로 국가주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은 13세기 초에 완성되었으며, 8만여 장의 목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그동안 원의 공격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전으로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 팔만대장경은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한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의 단결을 도모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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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통풍을 위해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 다르게 하였고

    흙바닥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함으로써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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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1237년부터 1248년까지 고려 중기에 편찬된 대장경으로, 한글로 번역되었고 대다라니 경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전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어 한국의 불교 문화와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 보존되는 방법과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몽골의 침공과 대응: 팔만대장경은 고려 중기인 13세기에 편찬되었으나,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대장경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몽골 지역에서도 팔만대장경의 일부 원고들이 발견되어 보존되었습니다.

    2. 팔만대장경의 발견: 13세기 말의 몽골 침공으로 인해 고려의 왕족과 승려들은 팔만대장경을 각기 소장하고 숨기는 등의 보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몇세기 동안 팔만대장경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3. 현대적 발견과 보존: 19세기 중반에 몽골에서 팔만대장경의 일부 원고가 발견되었고,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도 다양한 지역에서 원고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원고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수집되고 보존되었습니다.

    4. 디지털 보존: 현재 팔만대장경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도서관과 학술기관에서 보존 및 연구를 위해 소장되고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화된 형태로도 보존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열람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그 특별한 역사적 배경과 불교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노력으로 보존되어 오늘날에도 연구와 교육 등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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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현재까지도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13세기에 나무로 제작된 8만여 개의 팔만대장경판이 오늘날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재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존되어있습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r015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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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지금까지 잘 보관되고 있지만, 일본의 요구로 해인사에 보관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뻔하였으며, 또한 화재나 전쟁으로 사라질 위험을 몇 차례 겪었다.


    첫 번째 위기는 조선 초기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과 유구국 및 쓰시마가 고려 말부터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각종 토산물을 바치면서 더욱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특히 세종 때에는 대장경판의 자체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6년 정월, 2월, 12월, 7년 4월, 5월 등의 기록에는 일본 사신이 단식까지 하면서 완강하게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하자 세종은 대장경판이 우리나라에 오직 한 벌 밖에 없으므로 줄 수 없다고 말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대신하여 범자(梵字)의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 1질,금자(金字) [화엄경], [호국인왕경], [아미타경], [석가보] 등을 주어 가져가게 하였다.


    세종 6년 1월 20일조 기사 등을 보면, 왜통사 윤인보와 그의 아우 윤인시 그리고 그의 집에 있는 왜노 3명이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대장경판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많아지자, 세종은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도성 근처로 옮기는 계획까지 세운다. [세종실록] 19년 4월 28일조를 보면, 임금이 승지들에게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서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이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대장경판과 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및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 창녕, 거창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송암 김면(金沔,1541~1593),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을 걸고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면서 해인사와 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조선 후기 해인사에 수 차례 발생한 화재 이다.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8년(1695~1871)에 걸쳐 해인사에 일곱 차례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때 해인사에 무슨 건물이 화재를 당하였고, 또 새로 지어졌음에 대하여 1876년 2월 퇴암(退庵) 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95년, 1696년, 1743년(영조 19), 1763년(영조 39), 1780년(정조 4), 1817년(순조 17), 1871년(고종 8)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화재로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당우들은 모두 1817년 이후에 지어졌다. 특히, 1818년 때의중건은 1488년(성종 19)학조(學祖)대사의 해인사 중창 이후 해인사의 중건 역사상획을 긋는 큰 불사였다.

    네 번째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전쟁 때이었다.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와 함께 1950년 발생한 6・25전쟁 때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었는데, 이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이들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1921~1954)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 내렸다. 김영환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이러한 대령의 문화유산에 대한 식견과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처 : 위대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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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권태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승려분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습도 조절은 물론 유사시의 보존까지 신경쓰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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