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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한사발
숭늉한사발23.03.18

바티칸시국의 경비는 왜 스위스 근위대가 맡고 있나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면적이 작은 나라인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은 스위스 근위대가 오랜 기간 동안 경비를 맡고 있다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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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황 식스토 4세(재임기간1471-1484)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체결한 것이 시발점입니다. 그 이후로 이탈리아 반도내에 여러 세력과 대립하면서 스위스 용병들이 최전선에 나가 용맹하게 싸우며 그 명성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특히 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가 이끈 군대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지던 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가 비밀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피신하는 동안 189명의 근위병 가운데 근위대장을 비롯한 147명이 로마제국 군대에 저항해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40여명의 근위병이 교황 곁을 끝까지 호위해 충성심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바티칸시국의 군사와 치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과거 교황들이 교회군의 일부로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긴 했지만, 교황의 개인 경호원으로서의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 22일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교황청 연감 목록에는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에 종속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2005년 말엽, 근위병의 숫자는 134명이 되었다. 신병은 성좌와 스위스 간에 맺은 특별 협정에 따라, 스위스 국적의 젊은 남자 가톨릭 신자로 제한되어 있다. 팔라티누스 근위대와 귀족 근위대도 있었지만,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해체되었다. 최초의 주력군은 교황령에 복무하며 바티칸 영토 안에 근무하던 국민군이었지만, 귀족 근위대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의장병에 불과했다.

    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스위스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많은 곳에 용병을 보내서 그들이 벌어오는 돈이 스위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지요. 그들 스위스 용병들은 곳곳에서 용맹을 떨칩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및 그 호종들을 호위하여 탈출하려던 그 근위대도 스위스 출신 용병들입니다.

    스위스 군인들이 바티칸 경비를 맡는 것도 1천년 전 스위스가 가난하여 여기 저기 용병들을 보내던 시절에 만들어진 전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가 이끈 군대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지던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비밀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피신하는 동안 189명의

    근위병 가운데 근위대장을 비롯한

    147명이 로마제국 군대에 저항해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40여명의 근위병이

    교황 곁을 끝까지 호위해 충성심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충성서약의 전통도 로마약탈 당시

    희생당한 근위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경호를 맡았던 스위스 용병의 시작이 1527년 부르군디가 로마를 침공하였을때 용병들이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감수하면서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지켜낸 충성심이 완전한 인정을 받아 현재도 바티칸 시국의 경비는 스위스 용병만이 할수있도록 제도화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바티칸시국의 경비는 스위스의 용병들이 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교황 식스토 4세(재임기간1471-1484)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체결한 것이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805071724001#c2b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매년 5월6일,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립니다. 새롭게 선발된 스위스 근위대 병사들이 충성 서약을 하는 일입니다. 스위스 국적의 전과가 없는 미혼 남성으로 19~30세 사이의 나이에 신장이 최소 174cm이상되는 것이 기본조건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근위병이 바티칸을 호위하는 이유는 1527년 5월6일,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5세가 이끈 군대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지던 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가 비밀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피신하는 동안 189명의 근위병 가운데 근위 대장을 비롯한 147명이 로마 제국 군대에 저항해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40여명의 근위병이 교황 곁을 끝까지 호위해 충성심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의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충성서약의 전통도 로마약탈 당시 희생당한 근위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의 신변보호 요청으로 스위스 군인 150명이 로마에 도착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근위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스위스는 당시 나라가 궁핍해 청년들이 돈벌이를 위해 바티칸 용병으로 나서게 됐다. 특히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5세가 로마를 공격할 때 교황클레멘스7세를 지키려고 근위병 대다수가 목숨을 바치면서 바티칸으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티칸 시국이 스위스 근위대를 경비로 채용한 것은 근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는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전쟁 기간 중에 시작된 것으로, 당시 프랑스군이 로마를 침공하여 바티칸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바티칸교와 스위스가 조약을 체결하고, 스위스군에서 바티칸시국의 경비를 맡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후, 스위스 군인들이 믿음과 충성심이 깊은 군인으로 평가되어, 바티칸 시국의 경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도 스위스 근위대는 바티칸 시국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으며, 근위대 복장은 매우 아름답고 독특하여, 바티칸시국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