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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노을
제주노을22.12.05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봐관중인데요?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보관중인데요

팔만대장경을 하나씩 이고 날랐다는 얘기가 있던데 언체 있었던 이야기일까요?

정말 하나씩 머리에 이고 날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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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화도에서 팔만 대장경이 운반될때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온 곳이 개산포 입니다.

    영남일대에서 승려들이 경판을 머리에 이고 합천 해인사까지 운반한 것은 사실이고

    이포구를 경전이 도착한 곳이라하여 개경포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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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외벽에는 험난한 산길을 따라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향로를 든 동자승과 독경하는 스님이 길을 인도하고,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짊어진 백성들이 뒤를 따라 정성스럽게 운반하는 장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육백여 년 전, 외침을 피해 나라의 보배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한양을 거쳐 머나먼 고령 개경포(開經浦)로 이운하는 대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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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무신정권 때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것을 물리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최씨무신 정권은 몽골의 침입을 맞아 겅화도로 천도해 항쟁을 하고 백성들에게는 산이나 섬으로 피신하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은 해전에 경험이 없고 취약했던 것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이때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이 인력에 의한 작업이 많았으리라 추정되니 팔만대장경의 제조, 나무이동 등 모두 인럭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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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네 그렇습니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크게 화를 입은 고려는 호국불교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 입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울에 있는 지천사로 임시로 옮겨 모셨던 팔만대장경을 경남 가야산 해인사로 이송할 때 행렬의 맨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가 길을 안내하고, 대장경판을 조심스레 포장해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소달구지에 실고, 그 뒤를 수많은 스님들은 독경을 하며 뒤따르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과정도 그러했지만 이송한 과정 역시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태조가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합천 땅으로 옮긴 이유는 몽골군의 침략과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대장경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곳이 합천의 해인사였다고 합니다.

    해인사가 있던 가야산은 신령스러운 명산으로 여겨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보전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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