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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05.19

조선시대에 사민정책과 토관제도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에 여진으로 인해서

사민정책과 토관제도 만들어졌다는데

사민정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토관제도는 어떠한 내용을 담은 제도인가요?


사민정책과 토관제도가 여진과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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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민정책은

    세종 때 실시한 것으로, 남쪽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유역을 차지하지만 그 지역에 백성들이 없으므로 1433년 국가에서 남쪽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다. 사민 정책 후 그 지방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참고로 북에서 남으로 백성이 이주한 때는 1950년 6 · 25 사변 때이다.

    토관제도는

    세종 때 실시한 관리 임명 제도.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일대의 영토를 차지한 후 남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였다. 그 후 이곳의 백성들을 다스릴 지방관이 필요함에도 한양에서 함경도 지방으로 가려는 관리가 없자 국가에서 고려 시대의 사심관 제도와 성격이 같은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관리 임명 원칙은 그 지방 사람을 그 지방에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 상피 제도였으나 세종 때 임시로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민 정책 [徙民政策]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토관 제도 [土官制度]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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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 때 실시한 것으로 남쪽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입니다.

    4군 6진 개척으로 두만강 유역을 차지하지만 그 지역에 백성이 없어 1433년 국가에서 남쪽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실시합니다.

    이후 그 지방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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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지역 개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세종의 재위기까지 4군⋅6진을 개척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실제 국경선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민 정책은 기본적으로 북방 변경 지역의 방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북방 사민은 세종 대 처음 시작된 후 세조대와 성종대를 거치면서 경상⋅전라⋅충청 3도의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당시 사민되었던 사람들의 규모는 범죄자를 제외하고도 3,733호(戶)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세종 대에는 양계의 남쪽 지역에서 북방의 연변 지역으로 이주한 인구 규모가 5,658호나 되었습니다. 성종 대 이후 남방 지역 백성들의 대규모 북방 이주는 없었지만 중종⋅명종⋅선조 대에는 범죄인의 북방 사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세종에서 성종까지의 재위기 동안 대규모 사민 정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민 대상의 선정부터 이주, 안착, 주거지 등에 관한 철저한 계획과 지원책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이주민들이 해당 지역에 안착해서 대대로 거주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민 정책의 성공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생활 환경이 열악하고, 여진 세력과의 전쟁이 거듭되었던 북방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주민들의 안착을 위해 사대부의 경우 관직에 임명하거나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 등으로 지원했습니다


    토관은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수복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평양과 영흥, 그리고 제주도에 설치하였으며 세종 때 본격적인 북방 개척이 실시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 여러 군현에 설치되었습니다. 세조대에는 과거 수도였던 경주와 전주에도 잠깐 설치된 적이 있으나 곧 폐지되었고, 북방에 설치된 토관들도 조선 후기에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토관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유력자들을 임명하였는데, 문반과 무반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문반의 경우는 해당 지역의 관찰사, 무반은 병마절도사의 추천을 통해 임용되었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정식 관원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대우를 받았는데, 토관 출신으로 중앙 관직을 하사받을 경우는 품계를 1등급 낮추도록 하였습니다. 또 토관직은 정5품이 최상위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녹봉을 받지 않았고, 대신 3~10결 규모의 토지 수조권만 하사받았습니다. 토관의 업무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무반의 경우는 군사적인 방어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문반의 경우는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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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민 정책, 토관 제도(徙民政策, 土官制度)

    <사민 정책> 세종 때를 전후하여 4군 6진의 개척으로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추진된 이민 정책.

    <토관 제도> 평안도·함경도·제주도 지방의 토착민에게 주던 특수한 향직(鄕職)이 토관이었다. 변경 지방의 토착적인 유력 세력을 포섭하여 안으로는 효율적인 지방 통치와 군사 조직의 강화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이민족과의 연결을 막고자 하는 회유 정책의 일환.

    -출처 국어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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