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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친칠라280
대단한친칠라28023.01.10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의 예술적 가치는 무엇인가요?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개척자로 유명합니다. 비디오아트의 개념과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과의 차이점과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가지는 지 설 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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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새로운 예술적 사조를 만든 예술가 입니다.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뉴욕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비디오 매체의 수단으로 예술로 승화시킨 새롭게 인식시킨데에서 그 가치가 있다 판단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동안 미술에서는 그림과조각,판화 이런 것들 위주로만

    했던 예술 작품들을

    현존 했던 미디어를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는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미디어를 이용한 아티스트들이 늘었고

    그러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가 대단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1년, 백남준은 조지 마키나우스,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주도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개화된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들은 예술의 관념주의와 형식주의에서 탈피하여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백남준은 초기 전자음악을 바탕으로 파괴 행위가 주가 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행위로 유명세를 떨쳤다. 얼마 후 그는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1963년에는 〈음악 전람회-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첫 번째 개인전에서 미술사상 최초의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다. 13대의 TV와 3대의 피아노가 활용된 이 퍼포먼스에서는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 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소리가 나도록 조작한 TV가 설치되었다. 이는 관객 참여적, 임의적 예술 형태로, 매체가 지닌 일방적인 정보 전달 구조를 깨뜨리는 퍼포먼스였다.


    이듬해 백남준은 뉴욕으로 건너가 비디오 예술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1965년, 그는 비디오 캠코더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그 영상을 카페 어 고고(cafe a go-go)에서 방영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뉴욕에서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들은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에로틱한 음악과 퍼포먼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급기야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에서는 무어만이 상반신을 노출한 채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은 대단했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성을 주제로 한 선정적인 음악을 만들고 이를 테마로 하는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이렇게 설명한다.


    “왜 회화나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인 성(性)이 음악에서만 금지되는가. …… 음악사는 ‘D. H. 로렌스’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음악에 누드와 섹스를 도입해 음악의 시각화 작업을 시도했으며, 무엇보다 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하는 금기의 사슬을 끊고자 ‘성’의 표현을 도입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과 충격적인 퍼포먼스는 그의 작품을 단순한 유흥 혹은 해프닝으로 여겨지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TV 모니터들을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송출하는 비디오 아트 설치예술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런 작업들은 조각과 설치 미술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또한 그는 미술이 지닌 일방향성에서 탈피해 ‘상호작용’ 예술 개념을 도입했다. 예컨대 〈자석 TV〉는 모니터 외부에 자석 막대를 매달아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전자 시그널을 방해하여 TV 화면에 비추는 이미지를 변화시키도록 고안되어 있다. 관객은 자석 막대를 움직임으로써 다양한 추상적 형태 패턴을 볼 수 있다. 또한 〈참여 TV〉는 관객이 버튼을 눌러 화상을 바꿀 수 있는데, 이는 관객을 예술가 혹은 공동예술가로 작품에 참여시켜 관계를 맺는 시도였다.




    1970년대에 들어 백남준은 비디오 설치 작업에 몰입했고, 대표작인 〈TV 정원〉, 〈물고기 하늘을 날다〉, 〈비디오 물고기〉, 〈달은 가장 오래된 TV〉, 〈TV 시계〉 등이 탄생했다.


    1974년 작 〈TV 정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로, 전시회장을 열대 숲으로 꾸미고, 그 사이사이에 〈글로벌 그루브〉의 화려한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모니터들을 배치한 것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지역적 문화유산의 결합과 상생을 표현한 것으로, 자연화된 문화, 문화화된 자연의 도래를 예견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또한 〈글로벌 그루브〉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의 작품을 활용한 것으로, 예술 행위가 재정의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5년에 발표한 〈물고기 하늘을 날다〉에서는 모니터들을 천장에 매달아 관객이 누워서 보게 하여 감상의 시각을 바꾸는 한편,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지각 변화를 다차원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의 비디오 아트 세계는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84년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뉴욕 WNET,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비디오 아트를 TV로 송출했는데, 이는 예술의 전시 영역을 확장한 시도였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이를 더욱 확장한 것으로, WNET와 파리 퐁피두 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하여 이브 몽탕,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 앨런 긴즈버그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생중계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이라는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백남준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최고 전시관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으며, 1995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데 기여하면서 한국 미술이 세계에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