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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5

12.12사태의 발생 원인과 결과는 어떻게 된건지 궁금해요.

요즘 영화에서도 12.12사태에 대해 조명을 하던데요. 역사적으로 1979년에 큰 사건으로 남겨진 이유가 궁금합니다. 발생원인과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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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노란굴뚝새46
    노란굴뚝새4623.12.05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12군사반란은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시해사건을 수사하던 합수부가 안하무인 기고만장의 태도로 수사진행을 하던 꼴을 안좋게 보던 군 수뇌부가 합수부장인 전두환을 보안사령부에서 동해경비사령부로 좌천시키려는 계획을 보안사 감청을 통해 미리 알고 정승화 육참총장을 내란방조죄로 엮어 대통령재가도 없이 체포 구금하고 육본 등 군수권을 강제로 탈취한 사건으로 명백한 하극상에서 의한 군사반란으로 총살형에 처해질 중대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라는 허울로 포장되어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진 적이 없고 군부 내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 군사반란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국민은 유신 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국무총리 최규하가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수선한 상황에서 몇몇 군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게 바로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고 있었던 전두환이 이끄는 하나회 출신이 일부 군인들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12·12 군사 쿠데타, 1979). 신군부라 불린 이들 군인은 유신 헌법 체제를계승하여 군사 독재를 이어 가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5.17 계엄 확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을 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두환은 1980년 9월 11대 대통령으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사망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간에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는데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 주장,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합니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합니다.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는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내고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합니다.

    이 사건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순정으로 회귀하려했으며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단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사망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 했습니다.

    전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盧泰愚)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禹慶允)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 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했습다.

    한편, 정승화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金晋基)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許和平)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 됐습니다. 연회 도중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습니다.

    정승화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정병주와 장태완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대응하려 하였지만,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의 9사단을 끌어들이며 대처했습니다. 결국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며 반란 진압군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고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 했습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 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 역시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냈고 이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 했습니다.

    또한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군정으로 회귀하려 했습니다.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됐습니다. 그리고 이는 5·18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이어 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12사태는, 1979년10월26일 박정희대통령의 서거후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되어 시해 사건을 수사를 하였으나 전두환의 월권으로 정승화장군과 갈등이 생겼으며 12월 군 정기 인사에서 전두환을 동해안으로 전보시키려고 하는 정보가 사전에 노출되었습니다. 이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정승화 장군을 구금시키고 공수부대를 출동시켜 국방부,육군본부등을 점령하고 육본 장성을 구금시킨뒤, 최규하대통령에게 사후 재가를 받아 정권을 찬탈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아시다시피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고,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이 밀실투표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12사태로 인하여 전두환과 하나회과 정권을

    잡앗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전두환이 추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이에 신군부가 대한민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권태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보안사령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를 장악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