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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6.03

네델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네델란드가 과거에 스페인치하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로 독립하게되었나요? 어떤 역사적배경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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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9년과 1640년은 스페인에 있어 재앙의 해였다. 아르마다(Armada)도 패배했고, 1640년에는 포르투갈도 분리해 나갔으며, 카탈로니아(Catalonia) 지방에서는 무력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1642년부터 구즈만은 스페인 군대를 정리, 철수를 시작했는데, 프레더릭은 순풍을 타고 네덜란드 지역에서 스페인군의 잔재를 털어 나갔고, 교역도 발전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렇게 격상된 네덜란드의 지위는 프레더릭의 아들 빌럼과 영국의 찰스 1세의 딸 메어리 스튜어트(Mary Stuart)와의 결혼으로도 증명된다. 네덜란드의 공화국 의회는 스튜어트 가문에 유가 증권으로 가득 채운 금 광주리를 결혼 선물로 보냈다. 영국은 네덜란드가 이제 얼마나 강력한 국가가 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1646년에 이르러서야 던커크에 거점을 두고 네덜란드 선박을 약탈했던 해적 활동은 종식되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연합군이 그 도시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공격으로부터 대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공화국 내에서는 이제 평화에 대한 목소리가 드높아지게 되었는데, 많은 칼뱅주의자들과 제이란트, 유트레흐트와 프리스란트, 그리고 오란녀 가문은 스페인과의 평화에 반대를 했다. 프레더릭은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 그의 위치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쟁의 지속을 주장했고, 칼뱅주의자들은 구교 국가언 스페인과는 끝까지 항전해 구교를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이란트는 많은 부를 가져다 주고 있던 그들의 해상 약탈 행위가 더 이상 가능해지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각각 평화를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부터 평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고, 1648년 5월 15일, 뮌스터(Münster)에서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로써 네덜란드는 80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주권을 얻게 된 것이다. 1648년의 뮌스터 조약의 내용을 보면, 스페인의 왕은 네덜란드를 자유,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조약 체결 당시 양측이 소유한 지역은 그대로 유지하고, 스페인은 네덜란드가 정복한 동인도와 서인도 지역에의 항해를 금지하며, 스페인 왕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네덜란드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데 노력한다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프레더릭은 뮌스터 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647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지위는 아들 빌럼 2세에게 계승되었다. 빌럼 2세의 어머니는 스페인측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고 난 후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아들 빌럼 2세는 계속적인 전쟁을 고집했다. 그는 총 7개 주 중 6개 주에서 총독과 사령관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프리스란트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총독을 보유하고 있었다. 빌럼은 그의 숙부 마우리츠나 그의 아버지 프레더릭이 얻었던 군인으로서의 명성이나 인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 수행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홀란드 주는 평화를 고집했는데, 이들은 이 전쟁이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역에도 이롭지 않고, 또 무엇보다도 더 이상의 전투를 벌일 그런 긴박한 상황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빌럼 2세는, 1635년에 체결한 프랑스와의 조약은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스페인과 강화 조약을 맺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당연히 스페인과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화는 대세를 따라 도래했다. 뮌스터 조약은 네덜란드 공화국 의회가 승인한 것으로서, 빌럼 2세 개인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의 이러한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곳은 바로 홀란드(Holland) 주였다. 뮌스터 조약이 서명된 후, 홀란드 주는 대부분의 병사들을 철수시켰으며, 1650년 6월 4일부터는 군사들의 봉급 지불을 중단하였다. 이에 격분한 빌럼 2세는 프리스란트 총독 빌럼 프레더릭(Willem Frederik)과 홀란드 주, 특히 암스테르담에 응징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6월 30일, 6명의 홀란드 주의 신흥 귀족들을 체포해 루퍼스떼인(Loevestein) 요새에다 가두어 버리고, 군대를 아머스포르트(Amersfoort)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병사들이 호이(Gooi)에 이르러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암스테르담의 지도자들은 전갈을 통해 빌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암스테르담을 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럼의 군대가 암스테르담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는 암스테르담도 이미 방어 준비가 끝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은 곧 항복을 하고 난 후, 빌럼의 뜻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로써 암스테르담을 좌지우지하며 빌럼의 정책에 정면 도전했던 비커르(Bicker) 형제들은 빌럼의 손에 넘겨져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항복과 비커르 형제의 인도는, 빌럼 2세를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비커르 형제의 권세가 다른 신흥 귀족들이 보기에 너무 컸고, 또 암스테르담이 군대로 포위당했다면 국제적인 위신이 깎일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빌럼 2세의 군사 계획은 의회 내의 홀란드 주의 공작으로 실천되지 못했고, 더구나 그에게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는 천연두로 인해 1650년 11월 6일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빌럼 2세가 죽은 뒤 흐로닝언을 제외한 전 지역은 새 총독을 뽑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위험이 눈앞에서 사라진 상황이었으므로,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많은 권력을 한 몸에 소유하는 총독을 더 이상 원치 않았던 것이다. 1650년부터 1672년 사이는 네덜란드에 있어서 제1차 총독 부재 기간이었다. 1650년부터는 홀란드주의 신흥 귀족들이 네덜란드를 이끌어 나가던 시기였다. 프레더릭이 생존해 있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프레더릭이 일면 군주와 같은 면을 가지고 네덜란드를 이끌었던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중요한 정책들은 의회나 홀란드주 의회 혹은 신흥 귀족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결정되곤 했었다. 행정 장관 역시 1650년까지는 의회의 시종에 불과했었다.

    신흥 귀족층은 동질적인 무리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고,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던 이익 집단들 혹은 당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강력한 왕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이들의 목표는 나라가 잘 이끌려 나가는 것이었으며, 친빌럼파인가 반빌럼파인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홀란드 주의 영향력은 차츰 커져 갔는데, 이는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놓은 강력한 경제력 때문이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네덜란드의 독립 (네덜란드사, 1994. 6. 30., 김영중, 장붕익,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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