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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이라이763
프로파이라이76323.08.13

조선 시대에 형벌에는 어떤 종류들이 시행되었나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사람을 때리면서 형벌을 가하는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비인도적인 비윤리적인면이 있기 때문인데요. 과거 드라마에서 보면 곤장을 맞는 죄인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곤 하였는데. 실제 조선시대에 시행되었던 형벌들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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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태, 장, 도, 유, 사 5형으로 나뉘어집니다.

    태형은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으로 죄수를 형대에 묶어 하의를 내려 엉덩이를 노출시켜 한대씩 때리면서 세는 형벌입니다.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벌로 처벌 방식은 같으나 회초리의 크기가 더 큽니다.

    도형은 징역형으로 일정기간을 정해 죄인을 관아에 구금하고 완전한 노역을 시키는 형벌입니다.

    유형은 죄를 지은 자를 사형하지 않고 외딴 시골이나 섬 등 먼 곳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일정기간동안 제한된 장소에서 살게하는 귀양이 있습니다.

    사형은 살인자에게 내려진 벌로 사람의 목을 매는 교형, 목을 베는 참형, 머리, 양, 팔, 다리, 몸통 등의 여섯 부분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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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중국의 명률(明律)을 계수하여 보통형법으로서 적용하였으므로 명률의 형벌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조선 고유의 형법과 형벌이 우선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명률의 형벌과 조선 고유의 형벌을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명률의 형벌체계는 당 이래의 오형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형법총칙에 해당하는 명례율(名例律)에 오형지도(五刑之圖)·오형명의(五刑名義)·옥구지도(獄具之圖) 등을 규정하고, 태·장·도·유·사의 오형을 들고, 각각 금납에 의한 수속액(收贖額)을 명시하고 있다. 오형은 고려시대의 오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명률은 정형으로 태·장·도·유·사의 오형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실지 형벌을 운영함에 있어서는 오형 외의 형벌을 여러 가지로 추가하고 또는 각종 부가형(종형이라고도 함)을 첨가하여 사실상 율령상의 형벌보다 가중시키고 있다.


    ① 능지처사(凌遲處死): 좌참(剉斬) 또는 지해(支解)라고도 하며, 죄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지를 하나씩 베어내고 마지막에 목을 베어서 여섯 토막을 내어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며, 명률의 반역죄를 비롯하여 도적·인명·투구 등 각 항에 그 예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개국 초부터 능지형의 예가 많이 보인다. 능지는 시체를 토막내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지만, 시체토막을 기시하여 공개하거나 각 도에 회람시키거나 머리만을 매달고 효시하는 등 후속되는 부가형이 있어 시체에 대한 형벌을 가중시켰다.


    ② 천사(遷徙): 오형 가운데 유형은 본래 유 2,000리·유 2,500리·유 3,000리의 3종으로 그치는 것인데, 명률은 유 1,000리의 유형을 추가하고 천사형이라 칭하였으므로 유형이 4종이 된 셈이다. 천사형은 ‘천리향토천리지외(遷離鄕土千里之外)’ 하는 것이므로 유형의 실체와 다를 바가 없다. 명률의 호율 호역항 제9조에 천사형의 예가 보인다.


    ③ 변원충군(邊遠充軍): 대개 장형(杖刑)에 첨가되는 부가형이며, 장형을 집행한 뒤에 죄인은 변원지방으로 보내어 군인에 충당하고 군역에 종사하게 한 것이다. 군역을 천역이요 고역이라고 생각하여온 봉건사회제도하의 형벌이며, 무기한 군역에 종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軍)자를 붙인 직업은 오늘날까지도 천역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된다.


    ④ 자자(刺字): 고려율의 경면형과 같으며, 재물에 관한 죄를 범한 자에게 장(杖)·도(徒) 등의 정형에 따르는 부가형이며, 명률에 의하면 오른팔 위 또는 왼팔 위에 도관전(盜官錢)·창탈(槍奪)·절도·강도·강와(强窩) 등의 2자 또는 3자를 찍어 넣었다.

    각 글자의 사방 총면적은 1촌 5푼, 각 획의 너비는 1푼 5리로 위로 팔꿈치를 지나지 못하며, 아래로 팔목을 지나지 못하였다. 자자는 명률, 형률, 도적항에 많이 보인다. 자자를 씻어 없앴을 때에는 장 60에 처하고 다시 자자하였다.


    ⑤ 파직(罷職)·파역(罷役): 파직은 유품관인(有品官人)이 불법행위를 범하였을 때에 그 관직을 삭탈하는 부가형이고, 파역은 이원(吏員)의 관역, 즉 관인 아래에서 잡사를 맡아 관인을 돕는 이원의 직무를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파직이나 파역은 대개 변원충군이 수반되는 형벌로, 명률의 조문에 무수히 그 예를 볼 수 있다.


    ⑥ 이이(離異): 이이귀종(離異歸宗)이라 하여 남녀의 연을 끊고 혼인 전의 상태로 강제로 환원하는 것, 즉 강제이혼시키고 여자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즉, 여자에 대한 일방적인 처벌이다. 명률 호율의 혼인항에 그 예가 많이 보인다.


    ⑦ 재산단부(財産斷付): 단부는 부여(付與)·급부와 같은 말이며, 재산단부는 범죄인의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강제로 빼앗아 피해자 또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급부하는 재산적인 급부형이다. 명률의 형률 인명항과 소송항에 그 예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이래 명률을 형법전으로 삼고 적용 또는 의용(속대전 이후)하면서도 명률 소정의 형벌에 만족하지 않고 명률의 형벌을 가중하거나 변용하고 혹은 명률 외의 형벌을 발굴하거나 창설하여 조선 특유의 각종 형벌이 발생, 소멸, 번성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각종 형벌은 다음과 같다.

    ① 대시(待時)와 부대시(不待時): 명률에 의하면, 사형은 교(絞)와 참(斬) 두 가지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참형을 다시 대시참과 부대시참으로 나누었다. 십악(十惡:몸과 마음과 입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간도살인(奸盜殺人)이나 강상범(綱常犯)을 제외한 잡송(雜訟)은 무정(務停)·무개(務開)라고 하여 춘분 후에는 정지하고 추분 후에 재개하게 되어 있었다.


    사형의 집행은 추분 후, 춘분 전에 행형(行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사형판결을 받아도 추분이 올 때까지 기다려 집행하는 것을 대시참이라고 하고, 추분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부대시참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사주전문자(私鑄錢文者)나 승야취당살인자(乘夜聚黨殺人者)는 부대시참이었고 사민도망자(徙民逃亡者)는 대시참이었다.


    ② 거열·기시: 거열은 환(轘) 또는 환시(轘市)라고도 한다. 『경제육전』에는 원악향리를 거열에 처하는 규정이 있고, 1407년(태종 7) 11월에 내은가이(內隱加伊)가 환형을 당한 일이 있다.


    환은 시체를 거열하는 것으로 능지보다는 덜 참혹하므로 능지에 대신하여 자주 행하여졌다. 1410년 4월에 개국일등공신 조호(趙瑚)를 혜민국(惠民局) 가로상에서 환하고 시체를 지방에 회람시킨 일이 있다.

    1456년(세조 2) 6월에는 백관(모든 벼슬아치)을 거리에 몰아놓고 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을 거열하여 머리를 효시하고 각 도에 시체를 전시하였다.


    능지나 지해(팔다리를 떼내는 형벌)도 공개회람하는 행위가 뒤따르며, 기시도 시장에 시체토막을 공개하는 것이므로 거열(환)·기시·효시·능지(지해)·순형 등이 서로 관련이 있는 연속적 행형행위와 일환(一環)이며, 각 부분적 특징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③ 사사(賜死): 죄인에게 독약을 하사하여 강제로 마시게 함으로써 그 독약으로 생명을 끊게 하는 사형의 일종이다. 독약을 사약이라고 하며, 사약에 의한 사형은 왕족 또는 세도 있는 고관대작을 극형에 처할 수 없어 그 명예를 존중하여 왕이 직접 사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는 것이다. 단종의 독살을 비롯하여 조광조(趙光祖)·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 많은 인재가 사약으로 희생되었다.


    ④ 팽형(烹刑): 팽아지형(烹阿之刑)·팽아지전(烹阿之典)·저형(煮刑)·정확지형(鼎鑊之刑)·확팽지형(鑊烹之刑)이라고도 하며, 중국 한나라 때 생긴 형벌이다. 솥에 넣고 끓여 죽이는 형벌인데 매우 참혹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팽형을 시행한 일은 없다.


    다만, 조선 영조 초에 탐관오리를 팽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형으로 처한 일은 없고, 의례적·상징적으로 처한 예는 전하여지고 있다.


    즉, 탐관오리를 체포하여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에 큰 솥을 걸어놓고 군막(軍幕)을 치고 포도대장 이하 포도청 관리들이 도열한 가운데 죄인을 끌어다가 솥 속에 던져 넣은 뒤 포도대장이 죄인의 죄목을 낭독하고 팽형을 실시하였는데, 불을 피우는 형식을 취하여 팽형의식을 종료하고 죄인을 가족에게 인계하였다.


    가족은 죄인이 사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간주하여 형식적인 장례를 치르면 죄인은 사망자로 취급되고 은둔생활을 하여야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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