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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22

역사를 통틀어 보면, 고대 왕들은 왜 천문학과 역법을 중요시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고대 왕들은 천문학과 역법을 매우 중요시했었는데요.

(예를 들자면,그 옛날 첨성대와 같이 별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든것을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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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의 권위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던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은 천문학과 역법, 농업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전에는 농업에 중점을 두면서 천문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천문학은 천체의 움직임, 기후 변화,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을 연구하여 정치적 변화를 관찰하고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특히 왕은 자신이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문학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태조 왕건 때에는 고구려 천문도(평양 별자리)의 비문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열차분야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세종대왕 때는 천체의 움직임과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 간이 등의 천문 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의 시간 측정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천문학의 발달은 역법의 발달로 이어져 세종대왕은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칠정산》은 중국과 아라비아 역법을 바탕으로 한성을 기준으로 날짜와 계절의 변화를 계산하는 기법을 설명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문학은 초자연적 의미와 연관이 있어서 종교 또는 의식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은 계절을 예측하여 농업 활동을 조직하고 종교 축제를 계획하는 데 중요한 달력 개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점성술은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널리 퍼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점성술이 생겨났다. 천문현상으로 운명을 미리 알아내고자 하는 이 점성술, 즉 예언은 위정자(爲政者)가 가장 신경을 쓰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점성술을 제왕의 학(學)이라고 보았다. 즉, 동양적인 전제주의 밑에서 점성술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학문으로 발생하였고, 군주만이 그 지식을 사용하는 자유를 독점하고 있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성술은 일반 국민에게도 퍼졌다.


    점성술은 방법과 용도에 따라 국가의 일을 점치는 것과, 서민과 가까운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일로 구분된다. 앞의 것을 천변점성술(天變占星術), 뒤의 것을 숙명점성술(宿命占星術)이라고 한다.


    천변점성술은 천변에 의하여 땅 위의 현상을 점치는 것인데, 천변은 넓은 지역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일이므로 천하국가적이라는 뜻에서 위정의 학이라 하였다. 옛날 제왕들은 국태민안에 주력을 두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두려워하였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천문현상이 나타나면 제왕은 점성술사를 불렀다. 그 때문에 점성술사는 제왕의 정치고문으로 신하로서의 발언권도 강하였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 역대 군주는 천문현상에 항상 유의하였다. 이 천문현상을 당시에 나타난 지상현상과 아울러 자세히 기록하여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때 점성술에 적용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풍부한 관측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이러한 관측기록은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에 많이 실려 있다. 점성술은 천문학과는 다르지만 근세 이전의 천문학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과학지식, 특히 천문학이 발달되면서 점성술은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점성술 때문에 많은 관측 기록이 남기는 했지만, 점성술이 천문학의 발달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연금술(鍊金術)이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과는 다르다.


    점성술과 천문학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으면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점성술은 천문현상의 관측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은 제1의 과학이고, 점성술은 그 응용으로서 제2의 과학이라 하였다. 점성술로 생활비를 벌어 쓰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케플러는 말하기를, “점성술은 천문학의 어리석은 딸이지만, 그 딸이 화류계에 나서서 벌어 온 돈으로 어버이가 되는 천문학을 먹여 살린다.”라고 하였다. 점성술이 천문학 발전을 뒷받침한 예이다.


    천문법칙이 자세히 알려질수록 점성술사의 권위는 떨어져 갔다. 정치고문으로, 왕의 비서로, 재상들도 두려워하던 점성술사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서 기운을 잃고 제왕의 옆을 떠나 길가의 점쟁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