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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8.19

고려삼은이라 불린 인물 중 한명인 이색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 삼은이라고 불리었던 이색은 사대부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하였다는데요.


이색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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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41년 진사가 되고 1348년 3월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 1351년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 1352년 4월 전제의 개혁, 국방 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이듬해 향시와 덩동행성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었습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의 회시에 1등,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을 지냈으며 제과에 합격한 뒤 곧 귀국길에 올라 한산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12월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에 임명, 이듬해 윤정월 내서사인으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 3월 사은자 윤지표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구실로 1456년 1월 고려로 돌아와 중산대부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겸병부낭중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을 폐지하게 했습니다.

    1357년 2월 국좌재주, 7월 우간의대부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해 시행하도록했고 이듬해 7월 추밀원우부승선 한림학사가 되고 , 1360년 3월 추밀원좌부승선지예부사에 이르렀으며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 이후 좌승선, 지병부사, 우대언, 지군부사사, 동지춘추관사, 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1362년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에 임명, 고려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승진, 단성보리공신에 봉해졌고 1363년 윤3월 1361년 호종한 공으로 기해격주홍적공신에 봉해지지만 모친상을 당해 9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기복되었으나 곧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해 1373년 11월 면직되며 한산군에 봉해졌습니다.

    1375년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 판삼사사를 역임,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며 1388년 철령위문제가 일어나 화평을 주장, 1389년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했습니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을 조청해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했습니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에 유배, 이듬해 함창으로 옮겨졌다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가 발생함으로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되었습니다.

    1391년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해지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로 추방,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으며 1395년 한산백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색(李穡 : 1328(충숙왕 15)~1396(태조 5))은 고려말의 문신·학자이다. 호는 목은(牧隱)이고, 자는 영숙(潁叔)이다. 이곡(李穀)이 아버지이다. 고려말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색의 학문적 성장에는 그 자신의 재능과 함께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었던 아버지 이곡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는 가문의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14세에 불과하던 1341년 성균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20세에 아버지를 뵙기 위해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1348년에 원나라 조정 관리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국자감의 생원으로 뽑혀 3년간 수학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색은 신유학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1351년 이곡이 고려에서 죽자 이색은 상을 치르기 위해 귀국했다가, 1353년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원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을 하다가, 1356년 29세에 완전히 귀국하였다. 이색은 공민왕 재위 기간에 정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이는 대체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부응하려는 신진 사대부의 입장을 반영한다. 1352년(공민왕 1)에 아버지의 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무에 관한 상소를 올려 토지제도의 개혁, 국방의 개선, 국학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을 건의하였다. 귀국 후 이색은 다시 왕에게 8개 항의 건의를 하였으며, 이 중 정방의 폐지와 인사제도의 개선책이 시행되었다. 이색은 공민왕에게 주로 외교정책과 교육정책을 자문하였고, 이때 그가 공민왕과 맺은 특별한 관계는 그의 전생애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이 시기 그의 활동 중에서 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1357년에 우간의대부로 있으면서 부모의 3년상을 실시토록 한 것이다. 둘째는, 1367년에 공민왕이 성균관을 다시 짓자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을 신유학 연구의 중심으로 만든 일이다. 이때 이색은 김구용·정몽주·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 다른 교관들과 함께 경전에 대한 강의와 토론을 활발하게 벌임으로써, 정도전·하륜·권근·윤소종(尹紹宗) 등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주 성리학은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색이 고려말 유학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이때 성균관을 통해 많은 학자를 양성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공민왕이 죽은 후 수립된 이인임 정권 체제에서 이색은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한다. 우왕 재위기에도 그는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긴 했으나 이전처럼 두드러진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는다. 위화도 회군 뒤 이색은 공민왕 후손의 왕통을 안정시킴으로써,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려 애쓴다. 이것은 공민왕과 그 사이의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고려 왕조의 존속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창왕을 옹립하자는 의견을 밝혀 이를 실현시켰으며, 명에 사신으로 들어가 창왕의 입조(入朝)를 건의함으로써 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그는 1390년 이후 완전히 실각, 유배와 석방을 거듭하다가 조선 태조 5년에 죽는다. 이색의 학문은 원대 신유학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 과거를 볼 때 시험관이었던 구양현(歐陽玄, 호는 圭齋)과 학연을 맺게 되었고, 「기사」(紀事)라는 시에서는 스스로 구양현의 '의발을 전수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이색의 학문은 문학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는 여러 편의 글을 통해 나름의 도통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한유·주돈이·허형의 이름이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당·송·원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모두 문학자이면서 철학자인 인물들이다.


    이색은 특히 한유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나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그는 한유의 「원도」(原道)처럼 문학과 철학이 어우러진 경지를 학문적인 이상으로 본 둣하다. 철학적인 부분에서 이색이 가장 공들여 천착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음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지만, 그가 파악하는 마음은 강력한 도덕적 주체성이라기보다, 순수함 자체이다. 특히 그는 만년에 정치적인 불운을 겪으며 젊었을 때와는 달리 점차 불교를 용인하게 되면서, 불교가 추구하는 경지조차 이 순수한 마음 속에 포섭할 수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그러나 이색은 마음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을 토대로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가 추구했던 순수한 마음이란, 고려말 같은 격변기에 지식인 사회 전체를 떠받쳐 주기에는 너무도 가녀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색과 직간접으로 학문적 연을 맺고 있던 정도전·하륜 등은 마음의 문제를 떨쳐 버리고 사회 제도의 개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이들이 이끌어 낸 조선의 건국은, 또다른 의미에서 청년기의 이색과 그 동료들이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바쳤던 열정의 완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목은집』에 담겨 있으며, 이것은 『목은시고』(牧隱詩藁) 35권과 『목은문고』(牧隱文藁) 20권의 합본으로 되어 있다.

    출처 : 조선 전기 심성론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의 충신으로 3은을 들 수 있는데 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입니다. 목은 이색은 1328년 경북 영덕에서 이곡의 외아들로 태어나 1341년 원나라 유학하여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배웠습니다. 1351년 귀국하여 시정개혁 건의문을 올리고 이듬해 서정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회시에 장원하고 전시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국사원 편수관을 지내고 귀국하였습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 정당문학 대사성 문하시중 등 주요보직을 거치면서 성리학의 발전과 문화진흥에 공헌하였습니다. 유불선에 조예가 깊어 삼교를 통합하였고 그의 불사이군 충절은 후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권근 이숭인 길재 하륜 정도전 김종직 변계량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고려말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