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인좌의 난에 발생 원인은 무엇입니까?
조선시대 다양한 난들이 많이 발생 하였는데요 그중에서도 이인좌의 난은 상대적으로 그 원인과 결과가 잘 알려져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난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인좌의 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 : 뒤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 · 이유익(李有翼) · 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 昭顯世子의 曾孫)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부터 박필현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갔다.
이에 경중(京中)에서는 이하(李河) · 양명하(梁命夏) · 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 안음인으로 나중에 希亮으로 개명) · 나만치(羅萬致, 은진인) · 조덕규(趙德奎, 여주인) · 임서호(任瑞虎, 이천인) · 정세윤(鄭世胤, 안성인) · 이호(李昈, 진위인) · 민원보(閔元普, 충주인) · 이인좌(청주인) · 신천영(申天永, 청주인) · 김홍수(金弘壽, 상주인) · 이일좌(李日佐, 과천인) 등이 가담하였다.
또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경종의 前妃 沈氏의 동생으로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의 발설과 결부시켜 흉언을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와 괘서사건이 일어났고, 또한 이들은 가정(家丁) · 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募軍)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난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陽城人) 김중만(金重萬) 등이 각지의 취군(聚軍) 동태를 속속 고변하였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인좌의 난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 때 극심했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지만 집권세력인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분파되어 당쟁이 계속되었고 경종 때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극심해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강경파들은 영조가 숙종이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어있다 주장하며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며 남인들도 일부 가담합니다.
이들의 거병에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어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돈을 주고 동원했습니다.
이인좌는 1728년 3월 15일 청주성 함락,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퍼뜨리며 서울로 북상하나 24일 경기도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이인좌는 죽산 일대로 도피하다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지고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 거창, 합천, 함양을 점령하나 경상도 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발당했고,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 처형당했습니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했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며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졌고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인좌의 난 > 1728년 조선시대 영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 이라고도 합니다.
이인좌의 난 배경은 경종 사후 세제가 영조로 즉위했을 때 집권한 노론의 서슬에 밀려 소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밀려난 소론 세력들은 경종의 의문사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조정을 덮으려는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이인좌의 난 결과 >
이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는 패배하여 산에 있는 절로 달아나다가 경기도 주관에 살던 농민 신길만에게 잡혀 관아에 넘겨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인좌의 난은 조선 영조 4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란이라고도 하고,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이라고도 한다.
--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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