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육신은 성종 떄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부터 영조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습니다.
계유정난 공신들과 공신들의 후손들이 주류였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반에 이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조선의 지식인과 지배층을 이루고 정국을 주고하는데 이들이 사림입니다.
사림들에게 있어 사육신과 이들이 당한 고초들은 어디까지나 훈구 세력들의 추악한 만행들이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하고자 한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육신들은 신하로서 단종에 대한 충의를 지킨, 지조있는 선비들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양반사대부들에게 있어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결국 사림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 노론에서 사육신의 신원 복구에 나서게 됩니다.
효종 대에 노론의 핵심인사인 송준길, 송시열,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했고 효종은 이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 절차를 거치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으나 숙종은 이런 추증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순탄하게 세자가 되고 이후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통성 면에서는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인 경종을 두었으므로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이라는 여론이 이미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세손-세자-왕 단계를 거친 아버지 현종은 사육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 왕권은 강했으나 기반이 약한 후계자를 둔 점에서 숙종과 유사한 정조가 아예 배식단까지 만들어 단종과 연루되어 죽은 사람들을 전부 복권시켜준것을 보면 명확히 알수 있으며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 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