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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9.15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조선전기에는 안되고 조선후기에는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조선전기에는 논의조차되지못하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신하들에게 활발히 논의되고 국왕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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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육신은 성종 떄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부터 영조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습니다.

    계유정난 공신들과 공신들의 후손들이 주류였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반에 이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조선의 지식인과 지배층을 이루고 정국을 주고하는데 이들이 사림입니다.

    사림들에게 있어 사육신과 이들이 당한 고초들은 어디까지나 훈구 세력들의 추악한 만행들이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하고자 한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육신들은 신하로서 단종에 대한 충의를 지킨, 지조있는 선비들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양반사대부들에게 있어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결국 사림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 노론에서 사육신의 신원 복구에 나서게 됩니다.

    효종 대에 노론의 핵심인사인 송준길, 송시열,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했고 효종은 이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 절차를 거치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으나 숙종은 이런 추증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순탄하게 세자가 되고 이후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통성 면에서는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인 경종을 두었으므로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이라는 여론이 이미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세손-세자-왕 단계를 거친 아버지 현종은 사육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 왕권은 강했으나 기반이 약한 후계자를 둔 점에서 숙종과 유사한 정조가 아예 배식단까지 만들어 단종과 연루되어 죽은 사람들을 전부 복권시켜준것을 보면 명확히 알수 있으며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 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조선 전기에는 그 사육신 사건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 정계를 주도하고 있었기에(ex. 정창손의 후손 등) 불가능했던 것이고, 조선 후기에 이르게 되면 이데올로기도 많이 바뀌고, 사실상 권신 세력들이 많이 사라짐에 따라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계유정난 공신들과 공신들의 후손들이 지배세력이었지만 조선 전기와 달리 후반에는 이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사림 세력들이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평가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가로 챈 사건은 누구도 입에 쉽게 말을 담기 어려운 사건 이였습니다. 만일 단종의 복권을 논함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떄문 이였지요. 그래서 7대 세조왕이 사후에도 쉽게 단종의 복권에 대해서 상소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200년 지난 1670년에 19대 숙종이 재위한 후에야 비로소 단종의 복권 문제가 대두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