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유교사상이 자리잡게 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 오빠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게 다 유교사상의 영향인데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이
강하게 자리잡아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렀다고 하던데
이러한 유교사상이 왜 자리잡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서는 당장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기본 개념이 수용되었으나, 관학이나 외교 문서, 고대 문헌의 해석 수단 정도에 그쳤을 뿐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교나 도교만큼의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합니다.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멸망시킨 뒤 조선을 건설하면서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습니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적으로 교조화된 사회로 평가받는 성리학 천하를 달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 한반도는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남쪽에는
왜구 북쪽에는 홍건적, 권문세족들은 끝도없이
자신의 땅을 넓히고 불교는 타락하고 백성들이
기댈 때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성계라는 희망이
나타나고 이러한 악습을 정도전이라는 유학자가
새로운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설계하게 됩니다.
도덕이 바르게 된 나라, 부모를 공경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나라 그러한 이상적인 조선을 꿈꾸며
조선을 설계했고 유교의 나라 조선을 만들게
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교사상은 진시황제가 분서갱유를 저지르기 전인 선진유교 사상으로 공자 맹자 순자의 사상이 있었고 분서갱유 이후 한ㆍ당나라 때에는 경서를 복원하는 경학과 훈고학이 송나라 때에는 성리학으로 명나라 때는 양명학 청나라 때에는 고증학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특히 고려 말에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 들여온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정치사상으로 자리잡았으며 16세기 사림파들은 형식적인 의식에 연연하였습니다. 효종의 초상을 두고 3년상이냐 1년상이냐로 다투고 효종비의 초상때는 1년이냐 9개월이냐로 다투었습니다. 이로인해 사색당파로 나뉘어 한쪽이 득세하면 다른쪽은 유배나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빈번해졌습니다. 이런 형식주의가 오늘날 제례를 엄격히 지내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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