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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4.01.26

조선시대에 양반은 보통 몇명의 노비가 있어나요?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명문가로 불리었던 양반들은 많은 노비가 있었을 것 같은데 보통 몇 명이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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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에 사는 미관말직 양반 관료도 평균 100명의 노비를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758명의 노비를 재산으로 물려줬다고 하고 퇴계 이황도 367명의 노비 문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세종의 왕자 중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은 각각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 이후 신분제는 해이해지고 상공업이 발달하자, 그동안 토지를 매개로 묶여 있다 풀려난 유민들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17세기 들어서는 농촌 양반가의 노비 규모는 5~20명을 넘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보유 노비 수는 관직의 높낮이와 비례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인구의 40%가 노비 였다고 하며

    미관말직 양반 관료도 평균 100명의 노비를 소유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비가 면천 즉 노비신분을 탈피하는 것은 고가의 몸값을 제공해야했는데 이는 노비 한명의 값이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노비는 전근대 시기 노동력을 제공하고 또한 노비를 재생산하는 도구 및 재산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고대 시기 노예가 기원으로 그 당시에는 전쟁 노예가 대다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쟁 노예는 줄고 범죄로 인한 형벌노비나 생존을 위해 투탁하는 생계형노비가 많아졌습니다. 대다수는 노비가 자식을 낳아 노비가 되는 경우였습니다.

    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관노비부터 해방시키는 순서로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어 노비는 사라졌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은 많은 사유지를 가졌고 이를 경작하기 위해 노비를 보유했습니다. 그러나 노비로 경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에 소작을 주어 경작했습니다. 평범한 양반의 분재기 즉 재산상속을 보면 상속대상으로 노비 10여명을 나누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가문을 유지한 경우 그 정도 수준이 아닌가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노비가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로 나뉘는데 외거노비는 집밖에서 살면서 호주가 될 수 있었고 솔거노비는 집안에 기거하면서 집안일을 했던 노비입니다. 양천제도에서 양인들에게는 병역과 납세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양인들이 양반가에 호적상으로만 노비로 기재하는 일들이 횡행할 때도 있었습니다. 양반가에는 노비들이 식솔을 포함하여 5-10여명에 달했으나 호적상으로만 노비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적은 집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편으로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비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반들마다 권세도 다르고 규모도 달랐기에 이에 따라서

    노비의 수도 차이가 상당하였으니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