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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키위191
넉넉한키위19123.11.10

효종이 세자로 책봉당시 왜이리 거절을 한건가요?

효종이 인조에게 소현세자가 죽고나서 세자로 책봉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은 세자를 한사코 끝까지 지속적으로 거절을 하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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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이는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조선 왕실의 전통적인 법도를 뒤흔드는 결정이기도 했으며 봉림대군은 강하게 거부했고 신하들도 반대했지만 인조는 과거 177년전의 세조(조선 7대국왕)이 예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전례까지 들먹이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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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늘날 효종은 왜란과 호란으로 거의 무너져가는 듯 하던 조선의 역사를 이후 3백년 가까이 더 이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중흥군주'로도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원래 소현 세자의 아들, 자신의 조카가 왕이 되야 하는 것이 맞고 형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이고 미스터리한 죽음과 맞물려 효종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남겼고, 훗날 그의 사후에도 '예송논쟁' 등 조선이 거대한 정쟁에 휩쓸리는 불씨로 남게됩니다. 이과정에서 처음에 세자 자리를 사양 한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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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거부한 이유는 형인 소현세자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자 자리를 탐했다고 하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에서는 일어날 수없는 일이며, 이후 왕위 정통성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봉림대군이 올린 상소의 일부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여 뭐 하나 쳐줄 만한 것도 없는 위인이 집에 있으면서 봉록만 먹는지라, 항상 그 과실이 위로 성명(聖明)의 걱정을 끼치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게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신을 세자의 자리에 올리시는 전교를 내리시니, 신은 가슴을 치도록 망극하여 몸둘 곳이 없어서 밤낮을 쉬지 않고 놀라 부르짖어 울다가, 이렇게 궁박한 정황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말씀을 드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 세자(先世子) 가 오랫동안 동궁에 있다가 이제 막 서거하였고, 원손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우러러 아는 바입니다. 신이 만분의 일이나마 중대한 왕위(王位)의 부탁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감히 명분을 초월하여 그 자리에 대신 나아가 담당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오늘날이 어느 때이며 신이 어떤 사람입니까. "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 윤 6월 4일(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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