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고니시가 기독교 신자라는게 사실인가요?
임진왜란때 조선에 선봉으로 쳐들어왔던 고니시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게 사실인가요?? 그 당시 일본에 기독교신자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본에 기독교가 그 이전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출생년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현재 일본에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1595년 2월 10일 기록에 ‘행장(行長)은 금년 38세’라고 적힌 것을 통해 1558년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는 사카이 지역의 약재상이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 그는 사카이 내의 기독교도 상인 집단과 종교적 · 혈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당시 천하인으로 발돋움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사카이에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도 교류를 맺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 의하면, 류사는 교토에 이주했을 때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유키나가는 류사가 교토에 있었을 때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합니다.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침략했던 장수중 고시니 유키나가는 종교가 카톨릭신자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해서 나중에 일본에서 죽음을 맞이 할때 고해성사를 요청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인해 거절당하고 사제를 만나는것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처형됐을때 교회에서 목없는 시체만 거두어 고해성사를 행하고 기독교식 장례를 치뤘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출생년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현재 일본에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1595년 2월 10일 기록에 ‘행장(行長)은 금년 38세’라고 적힌 것을 통해 1558년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는 사카이 지역의 약재상이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 그는 사카이 내의 기독교도 상인 집단과 종교적 · 혈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당시 천하인으로 발돋움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사카이에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도 교류를 맺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 의하면, 류사는 교토에 이주했을 때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유키나가는 류사가 교토에 있었을 때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성장한 유키나가는 처음에는 비젠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래에 있었다. 이후 우키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항복하고자 했는데, 류사가 이미 노부나가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 아들 유키나가가 항복 교섭의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유키나가는 노부나가군의 총사령관 하시바 히데요시(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와 교섭했고, 교섭이 끝난 후 히데요시에게 회유되어 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출처 : 일본 다이묘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사실입니다. 당시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일본은 자연스레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에서 세례까지 받았고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에도 반대한 전적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 센코쿠 시대 무장으로 기독교도 다이묘 중 하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입니다.
그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어린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장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하며,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것을 사용,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다가 순교한다. 그는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