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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카노사의 굴욕에서 굴욕을 당한 사람이 카노사인가요?

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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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노사 성이 배경이 된 작품입니다.

    카노사성은 북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주의 카노사에 있는 성입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기독교의 교황 그레고리 7세 사이의 서임권 분쟁 중에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1077년 1월 28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되며, 권력과 종교 간의 갈등을 반영한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노사는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 라는 이탈리아 북부의 성 입니다.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 라는 이탈리아 북부의 성에 개인자격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가서 눈발이 흩날리는 성문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파문 철회를 호소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군주들과 타협하면서 교회의 재산을 늘리며 세력을 키워 갔어요.


    11세기 무렵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된 교회는 성직을 사고파는 등 부패가 끊이지 않았어요.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개혁 운동을 추진했어요.


    성직을 사고팔지 못하게 하고, 성직자는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또 성직자의 임명권을 군주(황제)로부터 교회로 가져오는 것이었어요.


    드디어 1075년 12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주교직 임명을 금지시켰어요.


    황제의 권한을 빼앗으려는 데에 화가 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려고 했어요.


    이에 교황은 로마 회의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키고 폐위를 하겠다고 선언하며 강력히 맞섰어요.


    그런데 이때 주교들과 귀족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렸어요.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굴복해 항복 문서를 보냈어요. 하지만 교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황제는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 있던 교황을 찾아가 눈 속에서 맨발로 3일이나 서 있었어요. 이렇게 굴욕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서야 교황의 용서를 구할 수 있었어요.


    카노사의 굴욕은 중세 유럽에서 종교인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에요.

    출처 : EBS 어린이 지식e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교황과 황제와의 갈등이 나타나자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사건을 말합니다.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파문은 종교적 공동체에서 쫓겨난다는 것인데, 쉽게 말하자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매장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제명당한 것이지요.

    파문으로 위기에 몰린 하인리히 4세가 파문을 철회해 달라며 교황이 있는 카노사성에 가서 눈이 휘날리는 3일 동안 맨발로 용서를 빌었고 이에 교황은 파문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얄짤없이 복수하긴 하지요.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직 서임권을 사이에 두고 교황과 황제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굴욕적인 사과를 한 것이 학교에서 배운 ‘카노사의 굴욕’이란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Canossa)라는 이탈리아 북부의 성에 개인 자격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가서 눈발이 흩날리는 성문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파문 철회를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카노사는 이 사건이 있었던 성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