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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28

진시황제가 분서갱유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시에는 사상가들이 많고 지식인들이 대접받지 않았나요?

진시황제는 무엇때문에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생매장 시켜버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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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로 보면 지성인에 대한 탄압이며,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진시황 즉위 34년에 사상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해 민간에서 가지고 있던

    의약ㆍ복서ㆍ농업에 관한 책만을 제외하고 모든 서적을 모아서 불사르고,

    이듬해 함양에서 수 백 사람의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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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시경), 서(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焚書)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坑儒)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 그게 아니어도 실상이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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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중국 지도를 보면 조나라, 위나라,한나라등 삼진이라고 불리는

    중앙의 3개국으로 문화가 동서로 분단됐습니다

    동중화와 서중화로 나누어 불렀습니다

    동중화에는 유교가 발생했죠 공자가 산둥반도에 있던 노나라 출신입니다

    진시황이 통일한 뒤에도 서중화의 법가는 유가와도 싸움을 벌여야했던겁니다

    빠르게 통일된 중국을 안정시키려면 유가를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고 진시황이

    생각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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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박사 70명과 함께 함양궁에서 주연을 벌였고 이때 제나라 출신인 순우월이 군현제에 반대하며 은, 주 시대의 봉건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자 승장인 이사는 이를 비판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사로운 학문으로 도당을 이루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의 건의로 협서율이 제정되어 의약, 복서, 종수 등의 분야를 제외한 시서, 제자백가의 서적은 박사관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군수와 군위가 수거해 모두 불사지르게 했고 명령을 받고 3일이 지나도 태우지 않으면 묵형과 성을 쌓는 일에 징발하는 형벌을 주게 했으며 무리를 지어 시서를 논하면 처형 후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기시의 형벌을 주게 했습니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불사의 선약을 얻기 위해 후하게 대우하던 후생과 노생이라는 방술사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어사를 시켜 함양에 있는 유생들을 조사해 자신을 비판하는 자를 찾게 했고 유생들이 서로 고발하여 금지를 어긴 460여명을 찾아내자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사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는 진나라 시황제가 사상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벌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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