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신문고'제도는 누구나 언제든 활용할 수 있었나요?
얼마전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던 중, 조선시대 국민들도 억울함을 알릴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게 바로 신문고 제도인데요. 헌데 생각만큼 이 제도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신문고 제도는 형식적으로 궁핍한 백성들을 위한 법률구조의 기능이 있었다는것을 알 수있지만 실상은 형식적인 의미일뿐 그 내면을 살펴본다면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고를 지키는 관리는 절차를 밟아서 치라고 하였고 절차란 첫번째로 소재지의 관사에 고하는것이었고 여기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때 사헌부에 다시 고발하고 여기서도 해결되지 않을때 신문고를 치게 했으니 이런 절차를 제대로 밟을 백성이 몇명이나 있을까요. 이러한 절차없이 신문고를 칠 수있는 일은 나라의 역모를 알리는 일 밖 에는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그 절차 때문에 신문고를 치기 힘들었다면 신문고를 칠수있는 사람은 중앙의 관리들이었겠죠. 이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신문고를 이용했고 또 역모의 낌새만 보여도 신문고를 쳤으니 태종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의심이 가는 인물들을 제압 할 수 있었고 역모자를 겨냥한 절묘한 철퇴였던게 바로 신문고제도였다고 보시면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고는 억울한 일이 있다고해서 무조건 신문고를 두드릴수는 없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해 사헌부에서 이를 해결하도록 했는데 이 기관에서 해결이 안되는 경우 신문고를 직접 울리게 했는데 이 절차가 복잡해 소요시간이 대략 1년은 걸렸습니다.
이 제도는 조선에서 백성의 목소리가 임금에게 닿게 하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었으나 임금은 한 나라의 지존하신 분으로 신문고를 울려 상소하는데에도 제한이 있었으며 오직 종사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해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건 해결에 신속성을 얻기 위해 신문고를 무질서하게 이용하는 현상이 초래되어 신문고는 사용 제한이 더 엄격해졌고 실질적으로 부민고소금지법 등으로 인해 일반 백성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었으며 오직 양반들만 신문고를 울렸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고는 중국송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직접 북소리를 듣고
억울한 일을 접수처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보
니 제한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조선왕조의 신분질서에 어긋나지 않게 신고를 제한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나 하인이 그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한다거나, 품관 ·향리·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또는 타인을 매수 ·사주하여 고발하게 하는 자는 벌을 주
었으며,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
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 해결하여 주었다고하니 일반민
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후 계속 신문고에 제한사항은 늘어나 자기 자신에게
관한 일, 부자지간에 관한 일, 적첩(정실과 첩이나 그 자녀)에 관한 일, 양반과 천민에 관한
일 등 4건사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기타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하도록
하여 실제에 있어서 신문고의 이용은 주로 서울의 관리들에게만 사용되었으며, 신문고 제
도의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
의 없었고 효용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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