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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줄나비104
슬기로운줄나비10423.05.02

조선후기에 신분제 동요가 생기게 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조선후기에 보면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되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된 시기(왕?)와 사회적 배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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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사회 발전에 따라 상민이나 중인 중에도 경제적으로 유복해지는 경우가 있고, 양반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면 인근 동네에서도 부자인 상민과 가난한 양반이 부딪히는 경우가 있고, "양반으로 가난하게 사느니 상놈이라도 돈만 많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이런 현상이 양반의 '신분적 권위'의 동요, 신분제의 동요입니다.

    신분 질서가 동요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양반의 증가를 들 수 있습니다. 상민이나 중인이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당시에는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니까요, 적어도 아들 하나를 낳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애를 낳았다고 보시면됩니다. 보통은 셋, 넷까지 낳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양반은 자연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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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분제의 동요

    붕당 정치의 변질로 양반 상호간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일당 전제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다수의 양반이 몰락하여 권반·향반·잔반으로 분화되었다. 상민들은 양반의 신분을 매입하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고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일반화 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는 동요하였다. 부의 축적을 통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면 역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서얼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한 사회적 활동의 제약으로 불만이 심화되었다. 또한 중인들 역시 사회적 역할(기술직·행정 실무)에 비해 고급 관료로의 진출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서얼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불만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서얼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납속·공명첩을 이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영·정조 때는 적극적인 신분 상승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상소를 통하여 동반이나 홍문관 등 청요직으로 진출 허용을 요구했고 드디어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진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 등이다.

    기술직 중인들은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여 철종 때는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부의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전문직으로서의 역할을 드러내며 역관들 같은 경우는 외래 문화 수용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며 사회 변화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노비의 해방

    군공과 납속을 통한 노비의 신분 상승과 공노비를 유지하는데 과다한 비용이 지출되면서 정부는 입역 노비를 납공 노비로 전환하였다. 특히 노비들이 도망 후에도 생계유지가 가능해지면서 신분 상승을 위한 노비의 도망이 확산되었다. 이후 양반의 증가와 상민의 감소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정부는 상민의 수를 늘리기 위한 방안으로 노비 종모법을 실시하여 노비의 신분 상승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이후 공노비 해방(1801, 중앙 관서 노비 66,000여 명 해방), 사노비 해방(1894, 갑오개혁 때 신분제 폐지 → 법제상 종말)으로 많은 노비들이 상민으로 전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분제의 동요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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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는 16세기경부터 서서히 붕괴되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로 분화되어 갔습니다. 이와 같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조선 왕조 말기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유지되었으나,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인구가 늘고 상민과 노비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가 나타났습니다.


    양반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상민들이 군역을 모면하기 위하여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고, 직첩을 사기도 하였으며, 학생을 사칭하기도 하고, 양반과 혼인을 하여 양반 신분을 획득한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상민의 부담 가운데서 군역 부담이 가장 무거웠기 때문이었으며, 또 한편 상민 가운데서 재산을 모은 자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양반이 늘어남에 따라, 양반 내에는 복잡한 계층이 생겼습니다. 위로는 집권당파의 권세 있는 양반이 있는가 하면, 향촌 사회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 또는 토반이 있고, 또 그 밑에는 중앙 정계에서는 물론 향촌 사회에서도 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하층 양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양반이라 해서 모두가 권세가 있고 재산이 많으며 학식이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권세와 재산과 학식이 없는 양반들은 상민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한편, 상민과 노비의 구별도 점차 모호해졌습니다. 양반이 되지 못한 상민들은 관리가 되기가 어려웠고, 국가나 지주에 대한 부담이 커졌으며, 또 그 중의 상당수는 임노동자로 되었기 때문에, 법제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노비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노비들 중에는 도망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혹은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하여 평민이 되는 자가 늘어났습니다.


    이에, 국가는 평민이 줄어드는 것은 재정상으로도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노비들을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특히,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공노비를 단계적으로 풀어 주어, 순조 때에는 약 5만 명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사노비는 공노비처럼 빨리 평민화되지는 못했으나, 옛날처럼 주인(상전)에게 강하게 예속되지도 않았고, 상민과의 결혼도 빈번해져,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고,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 이동이 정치 권력을 좌우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가운데, 권세 있는 벌열 양반의 지배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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