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가 왜 축구단을 운영했던건가요?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무슨 이유로 국가대표 축구단을 운영했던건가요?
다른 스포츠들도 국가정보기관에서 운영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지축구단은 1967년 2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존속한, 중앙정보부 소속의 축구팀이었다. 특히 한국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축구팀이다.
직접적인 배경은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월드컵 8강행 충격에 있었다. 당시 북한의 월드컵 8강은 세계적인 이슈이기도 했지만, 남북간 체제 경쟁의 구도가 극에 달했던 1960년대 후반, 북한의 8강행이 남한 정부에게 준 충격의 강도는 엄청난 것이었다.[1] 특히, 북한팀과는 언제든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등에서 맞닿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감은 더한 것이었고, 이에,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국가적 지원하에 북한 축구팀을 꺽을 역량을 가진 남한 최고의 축구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2] 이에 1967년 2월 창단된 것이 양지축구단. 양지축구단에서 양지는 당시 중앙 정보부의 표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에서 따온 것이었다.
출처: 풋케wiki 양지축구단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국 북한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양지 축구단을 만든 것 입니다. 1966년 피파 월드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전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 북한의 축구 대표팀은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태리를 꺾었고, 8강전에서 아깝게 역전패를 당했지만 포르투칼과 대등하게 맞섰다고 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의 선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극심한 체제 경쟁을 벌이던 대한민국에게는 충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권력이 막강 했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국은 축구팀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당시에는 프로 축구가 있기 전이었으므로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적인 지원책을 강구한 것인데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 군에 입대한 병사 뿐만 아니라 당시 입대 연령대의 축구 선수들을 모두 모아서 축구팀을 만들었고 '황금 다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최정민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이세연, 김호, 이희택등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축구단을 운영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이미지 향상과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정보보호 및 국가안보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스포츠 발전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축구단을 운영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1968년에 축구단 '육군사관학교 축구단'을 인수하여 '중앙정보부 축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육아공 축구단'으로 개칭되었고, 이는 1985년에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축구단 외에도 야구단인 '오비 베어스' (현재의 두산 베어스)도 운영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단체 운영은 대한민국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에서의 성과를 통해 대한민국의 이미지 향상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스포츠 팀 운영은 대한민국의 국가 기관 특유의 관행이었고, 이러한 행위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포츠 팀의 운영이 정보 기관의 본연의 업무와는 별개의 것이며, 때때로 이런 활동이 정치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80년대 말 이후로 이런 식의 스포츠 팀 운영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