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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1.08

제주 4.3 사건에서 어떤 사건과 잔혹한 폭력이 발생했나요?

제주 4.3 사건에서 어떤 사건들과 반인륜적인 사고가 발생하였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떤 규모의 폭력과 희생이 있었는지 이후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해 어떤 보상이나 대처가 이루어졌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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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당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의 진압과정에서 제주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제주 4.3사건 민간인 희생자수는 14,442명이며 민간인 희생자는 최대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며 진압군은 1,091명 사망했습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희생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에 3월 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민, 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는데 이 파업에는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단페의 4만 1211명이 참가합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며 본토에서는 응원경찰을 대거 파견,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단원들까지 제주에 들어와 곳곳을 장악합니다.

    이들은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 고문 후 이 가운데 250여명을 재판에 회부, 이로 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나 미 군정은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하는 등 강경책을 지속합니다.

    그러자 분노한 도민들은 국우파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미군 축출과 경찰 타도 등을 외치기 시작, 이에 미군정은 1947년 8월 15일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도민들과 도민 지도자들은 한라산으로 몰려듭니다.

    2003년 10월 15일 4.3을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가 확정, 보고서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적시하면서 정부 차원의 사과와 희생자 지원을 건의했습니다.

    이 보고서 확정 후 제주도민 및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 추모기념일 지정, 4.3평화공원 조성, 유가족에 대한 생계비 지원, 집단 매장지 발굴 지원 등 7개항을 담은 대정부 건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2013년 8월 국회는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3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했으며 정부는 2014년 3월 18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3월 24일자 관보에 개재함으로 4.3희생자 추념일 지정을 위한 대통령령 개정안이 공포, 이에 따라 4월 3일이 4.3희생자 추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제주도는 북동아의 지리적 요충지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6만명 주둔하고 있었으며 미 군정하에서 친일 경찰 공무원 등이 그대로 중용됨으로써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태 1947년 3월 1일 주민에 대한 발포가 발단이 되어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강제진압하다보니 충돌이 크게 번지게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내려온 미 군정청의 조병옥은 3.1사건이 폭동이며 다른 지방의 경찰까지 동원하여 3.15일 200여명을 검거하여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감행하는 등 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경찰들의 대대적인 체포작전으로 4.3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1947년 11월 17일 UN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허용하자 좌익 우익할 것 없이 반발하게 됩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12:7로 무장투쟁을 통과하여 무장투쟁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청년 3명이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제주도내 24개 지서 중 12개 지서가 습격을 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의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공격하도록 지시하였고 경찰 뿐만아니라 9연대까지 파병하여 사살하여 3000여명이 총상으로 죽었습니다. 이후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제주도에는 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부역자들에 대한 처형이 계속되었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파악된 숫자만 1만 4천영이 넘었으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으나 진상규명과 보상은 진행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