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는 왜 공신에 임명 되지않았나요?
임진왜란 당시 노병장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입니다. 큰 공을 세우고 왜란 후에도 벼슬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공신에는 빠져있어요. 선조가 곽재우를 아주 싫어했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곽재우는 34세 때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선조를 비판한 답안지를 내서 선조의 명에 의해 합격이 취소되고,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4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왜 선졸ㄹ 비파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알려 진바가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선조 25년)일어나고 관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고 한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에 사망했다. 34세 때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평생 은거할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하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고사하여 은거의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저서로 『망우당집』을 남겼습니다.
생애 및 활동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에 승진해 조방장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왔습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해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습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암진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로 승진했습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 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 삼도 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습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습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솥바위 나루)과 세간리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 · 창녕 · 영산 · 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 · 창녕 · 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 · 영산 · 창녕 · 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에 ‘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이다. 문화체육부가 제정한 1995년 12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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