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실각은 외교정책보다 개인의 도덕적 결함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이 이용한
측면이 강합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당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功過)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붕당(朋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