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당시 신하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금 시점으로 보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당시 신하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조선 최초로 후궁 태생의 서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로 출신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초기에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했던 탓에 사대의 예를 중시하는 조정 관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치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둘 다 있습니다. 일부 사림은 전통적인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큰 약점을 가진 인물 이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실각은 외교정책보다 개인의 도덕적 결함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이 이용한
측면이 강합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당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功過)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붕당(朋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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