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6.25 전쟁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해 알려주세요.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이 직면한 상황과 전쟁의 영향에 대해 알려주세요.
그리고 군사적인 측면 외에도 전쟁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25 전쟁의 배경은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정권이 수립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각각 북진 통일과 남조선 해방을 내세우며 38도선 부근에서 잦은 무력 충돌을 빈번했으며, 지리산 일대에서는 좌익 세력이 무장 활동을 펼치며 남한 사회에 혼란 중이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남침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전차와 비행기 등 신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중국 내전에 참여했던 조선 의용군 등을 북한군에 편입하였습니다. 1950년 초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고, 중국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습니다. 남한은 조선 경비대를 모체로 국군을 창설해 치안을 확보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으나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으로 남한이 제외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도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전차를 앞세워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기세를 몰아 낙동강까지 진하였습니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해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깁니다. 다행하게도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돌파해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중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결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남하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었지만 (1·4 후퇴) 전열을 가다듬어 70여 일 만에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이후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소모적인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소련의 제의로 정전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1951. 7.). 하지만 휴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방식 등을 둘러싸고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38도선 부근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인명 피해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정전 회담이 무르익어 갈무렵 대통령 이승만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습니다(1953. 6. 18.). 이로 인해 다소 지연되었지만 회담이 시작된 지 2년여 만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1953.7.27.)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가 컸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남북한 적대감이 더욱 높아졌으며, 분단의 고착화 되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한미간의 연대는 강화되었으며, 일본은 전쟁 특수로 2차 대전의 경제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냉전 시대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었습니다.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혔고, 무력으로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또한 이산가족의 아픔과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로 인한 고통,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 문제 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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