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은 로마 제국의 문화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입니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홍예석 등으로 지어져 있고,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고 합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에서 유래합니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고 전해집니다.
콜로세움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콜로세움의 위치는 주거지역이었다. 하지만 서기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나고 그 곳에 서있던 건물들이 모두 타버리자 네로 황제는 현재 콜로세움이 서있는 자리, 즉 팔라티노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에 거대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와 인공 호수, 정원들을 지었습니다. 기존 수로들이 이 정원에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하게 개축되었고, 궁전과 정원들은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또한 궁전의 옆에 그의 모습을 본딴 거대한 청동 거상을 지었습니다.
네로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는 살해되었다. 후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의 궁전을 헐어버린 후, 그 부지에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황제의 사유지였던 공간을 다시 군중에게 돌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근처에 검투사 양성 학교, 기타 지원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원형극장들이 주로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있었던 것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독특하게도 도심의 한가운데에 정확히 계획되어 지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콜레세움은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투기장으로 이 탑의 것은 원형 극작이라고 하는 건축물로 서기 80년 경 완공되었습니다.
원형극장도 두 종류가 있어 콜로세움처럼 검투사 경기, 서커스 관람 등을 하는 스타디움의 개념인 엠피시어터가 있고, 아른 것으로 원형 좌석이 있어 희곡, 연주 등을 행하는 예술적 상영장인 엠피시어터가있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전자의 것으로 로마가 건축한 것 중 가장 큰 원형극장이며, 완전 원형은 아니고 타원형 입니다.
이 투기장은 불, 물, 싸움 구경을 하는 장소로 로마의 정치인들은 빵과 서커스로 국민들의 불만을 억제하려 했으므로 콜로세움의운영은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이었고, 수용 규모는 입석의 형태까지 고려하면 5만은 상회하고 최대 8만은 수용할수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매우 효율적으로 지어져 각층, 각 섹션별로 현대의 경기장처럼 입, 퇴장 하는 게이트가 따로 마련되어있어 자신이 어느 구역에 있느냐에 따라 그 게이트를 이용하면 대규모 인원이 관람함에도 붐비지 않고 입, 퇴장이 가능했습니다.
땡볕이 심한 낮 경기가 벌어질 때 콜로세움의 천장에 미세노에서 파견나온 해군 수병들이 범포를 덮어 그늘을 제공, 내벽 가장 위층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것들을 일종의 와이어로 연결해 접어놓은 천으로 덮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완전히 독립적인 건축물로 외벽은 10만 입방 미터에 달하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지고 300톤에 이르는 청동 구조물로 지탱되었으나 수세기 동안 지진들이 일어나며 곳곳에 균열이 갔고 남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현재 북쪽 벽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고 외벽 끝부분에 발라져있는 삼각형 모양의 콘크리트 지지물은 19세기 초 추가되었습니다.
외벽은 층층이 쌓여있는 3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졌으며 이 기둥의 열들은 층마다 그 양식이 다른데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을 모두 사용했으며 2층과 3층의 아치에 원래 신화 등장인물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합니다.
콜로세움은 최대 8만 7천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하고 있었고 좌석들은 로마 사회의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경기장과 경기장 가까운 하부의 좌석을 쓸 수 있었고, 계급이 낮을수록 경기가 자세히 보이지 않아 위쪽의 좌석을 분배받았습니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지었으며 도리아는 남성, 이오니아는 여성으로 주로 표현되었습니다.
경기장은 모래로 뒤덮인 나무 바닥으로 정교한 지하의 구조들을 가리고 있었으며, 이 구조물들에는 노예, 검투사들이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맹수와 동물들이 이 곳에서 갇혀 대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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