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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8

중국의 수나라는 왜 빨리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중국은 많은 시대 왕조가 있었는데요 그 가운데 수나라는 왜 이렇게 빨리 멸망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수나라때는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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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바고트리니다
    토바고트리니다23.12.22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리한 고구려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자 수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598년 고구려가 북방 지역의 말갈족과 연합해 먼저 수나라를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수나라의 두 번째 황제 양제가612년 고구려를 복속시키기 위해113만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살수(청천강)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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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나라는 운하 건설 등의 토목 공사를 진행하면서 많은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민심이 악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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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은 문제 때 시작해서 양제 때 끝났으며, 공사를 위해 막대한 조세와 부역, 군역 등 대규모 토목 공사로 인해 국가 경제를 파탄 시킨 것이 멸망 원인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또한 4차 고구려 전쟁 과 돌궐의 반란 또한 수나라의 몰락 원인 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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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초강대국 수나라, 고구려와 돌궐을 주시하다

    수나라라는 초강대국의 출현으로 동아시아는 팽팽한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고도의 양면 외교를 펼칠 만큼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삼국의 선두주자이며 거란이나 말갈족의 지배를 두고 중국과 국경을 다투는 만주의 실력자 고구려의 존재는 수나라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서북의 돌궐도 북주와 북제의 분열을 틈타 강력한 유목국가로 성장했다.

    수나라는 통일의 기세를 몰아 돌궐과 고구려를 주시하였다. '왼쪽 눈으로 돌궐을 무섭게 쏘아보고, 오른쪽 눈으로는 고구려의 동정을 주의 깊게 주시'하는 형국이었다. 때마침 돌궐은 '가한'이라고 불리는 제왕의 지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고, 수는 이를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제국을 동서로 분열시키는 공작에 성공했다.

    문제, 요서에서 고구려에 패하다

    고구려는 수왕조가 수립되자 곧바로 사절을 보내 수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나, 남조의 진왕조와의 교섭도 단절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중국의 책봉에서 고구려가 받은 칭호는 '요동군공 고구려왕' 정도였다. 그러나 진이 멸망해버리자 고구려는 방위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돌궐과 연합을 꾀하면서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수나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는 거란 · 말갈 등에까지 세력을 뻗쳐옴에 따라, 요서방면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영양왕은 598년 요서를 공격하였고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수륙으로 침공해 들어왔다. 결과는 수의 참패였지만 고구려 측의 손실도 컸다. 고구려는 다시 형식적인 사죄 사절을 보내 사태를 진정시켰다.

    양제, 고구려 침공을 위해 대규모 원정을 하다

    양제는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에 매달렸다. 607년의 어느 날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고구려 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결탁은 수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으며, 게다가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은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뒷날, 수는 백제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탐색하는 일을 의뢰했으나 백제는 막상 수의 침공 때에는 중립을 지켰다.

    612년 1월, 드디어 양제는 고구려를 '군신의 예를 어기는 자'라고 힐책하면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대운하의 북쪽 종점인 북경에는 113만의 대군이 집결했고 보급부대의 숫자는 그 2배를 넘었다. 병사들의 행렬은 장장 480km에 달해 출발에만 40일이 걸렸다. 수군 정예부대 4만 명도 산동 반도를 떠나 평양으로 진격했다.

    수나라의 평양성 공격, 살수대첩에서 참패하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함으로써 서전을 장식했다. 그러나 요하를 건널 때부터 이동식 다리인 부교가 설계 착오로 짧게 만들어져 전쟁도 하기 전에 많은 사상자를 낸 데다가, 요동성의 철통같은 방비는 대군의 3개월간의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군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외곽까지 진격했으나, 고건무가 지휘하는 결사대 500명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수나라 군대는 할 수 없이 30만 정예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을지문덕살수대첩 등으로 수양제의 대군을 격파해낸 고구려의 을지문덕.

    이때 고구려의 총지휘관 을지문덕은 수의 별동대를 깊숙이 끌어들인 후 일시에 섬멸하는 작전을 세워놓고 예정된 후퇴를 거듭했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 7번 싸워 7번 이기는 승전을 거듭하며 평양성에 닿았다.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평양성 북방 30리에 병영을 설치한 수의 명장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의 시 한 수가 날아왔다.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아서 그치기를 바라노라.

    우중문은 서둘러 총퇴각을 명령했으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뒤였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수나라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고구려의 복병은 퇴각하는 수나라의 병사들을 사면에서 공격해댔다. 고구려는 패주하던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를 반쯤 건넜을 때 막아놓았던 강물을 일시에 터뜨림으로써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30만 별동대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세계 전투사에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수양제의 대군이 무참히 격파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수나라는 이 싸움에서 대패함으로써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 몰락의 길에 치닫다

    1차 원정에서 뼈아픈 참패를 당한 양제는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요동에 가서 개죽음 당하지 말자'는 노래가 유행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어 헛되이 인생을 마감하기를 원치 않았다. 민심이 떠난 것을 알아챈 지방의 유력자들도 수왕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2차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이 급거 철수하게 된 것은 보급을 담당했던 양현감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나라는 거듭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의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었다. 각지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양제는 강도에서 시국을 점치고 있던 중, 결국 자신의 친위대장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함으로써 50년의 생을 마쳤다. 그때가 618년, 수가 건국된 지 불과 2대 37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주모자가 누구냐?"

    죽음 직전, 양제의 호통에 들리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온 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수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200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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