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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5.08

워털루전투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프랑스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인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워털루 전투는 어떻게 해서 전개됐고 프랑스가 패배했는지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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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15년 6월 재집권한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입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I, 1769~1821)은 이듬해 폐위되어 엘바 섬(Elva Island)으로 유배되었다. 연합군은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Louis XVIII, 1755~1824)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루이 18세의 통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나폴레옹 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소집되었던 빈 회의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부하 1,000여 명과 함께 파리로 진군하였다. 루이 18세는 관군을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관군을 이끌고 있던 네이 원수와 술트 원수가 나폴레옹에 가담하게 된다. 결국 루이 18세는 영국으로 도피하고, 나폴레옹은 20여 일만에 파리에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 각국은 즉각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군을 결집한다. 나폴레옹은 서둘러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프랑스 주력군 12만 5,000명을 프랑스 북쪽 국경에 배치시켰다. 이때 북쪽 방향에서 진군 중이던 연합군은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이 이끄는 약 9만 5,000명의 영국군과 블뤼허(Bluecher, 1742~1819)가 지휘하는 약 12만의 프로이센군이었다. 나폴레옹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프랑스 군의 질적인 우위를 이용, 조기에 각개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 군과 연합군은 벨기에의 워털루(Waterloo)에서 격돌하였다. 나폴레옹은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에 1만 6,000여 명의 사상자를 안기고, 블뤼허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병력의 3분의 1을 내어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고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영국군에 가담하면서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듯하던 전세가 한 번에 연합군으로 기울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4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그는 6월 22일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Island)로 유배되었고 1821년 5월 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외국으로 도피해 있었던 귀족들도 대거 프랑스로 돌아왔다. 진척이 없던 빈 회의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최종의정서가 의결되었다. 절대 왕정의 복고로,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퍼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워털루전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폴레옹의 패배는 잘못된 지휘 때문
    1815년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 군을 물리친 프랑스군은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기습 측면 공격 때문에 참패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군대 중 2만 5천 명이 사상당하고 9천 명이 포로가 됐다. 이 전투로 인해 나폴레옹의 백일 천하는 끝나게 된다. 그토록 강력하던 나폴레옹군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의 지은이 에릭 두르슈미트는 나폴레옹이 패한 원인을 그루시 장군 탓이라고 말한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저지른 최초의 실수는 잘못된 역할 분배 때문이었다. 좌측의 지휘권을 네(Ney)에게 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우측 부대와 예비병력의 지휘권을 그루시에게 넘긴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루시는 이미 은퇴하여 퇴물이 다 된 장군이었다. 당연히 전쟁에 의욕이 없었다.

    좌측의 네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3만 3천 명이나 되는 그루시의 부대는 일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루시는 정찰대를 보내지도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네 장군 역시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막강한 기병 군단을 잘 다루는 총명한 장군이었지만 보병 없는 기병이란 고물 없는 찐빵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는 보병 없이 기병만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산탄포가 작렬했다. 산탄포에 기병들이 쓰러지고 말들이 넘어졌다. 네의 기병대는 영국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네는 결국 영국군을 격퇴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멀리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저런. 네가 너무 성급하게 공격하고 있어. 저것이 큰 화를 초래할 것이야."

    영국군의 대포를 장악한 프랑스 기병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병은 시체가 되기 전까지는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다. 대포를 장악했지만 그 대포를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포를 쓸 보병이 없었다. 당시 전투에서는 적군의 대포를 못쓰게 만드는 방법으로 못을 이용했다. 다시 뽑을 수 없도록 대가리 없는 못을 점화구에 박아 넣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기병 중에는 못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곧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기병 전투 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이 밀렸다. 네 장군은 나폴레옹에게 보병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네의 무모한 기병 공격에 화가 난 상태였다. "보병을? 어디에서 보병을 데려 온단 말이냐? 지금 너는 내가 보병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줄로 아느냐?" 이것이 나폴레옹의 대답이었지만 그는 곧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근위대 6천 명을 네에게 보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영국군은 빼앗겼던 대포를 다시 장악했고 파손되지 않은 대포를 이용해 곧바로 대반격을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무너졌다. 뼈 아픈 오판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바꾼 순간이었다. 그루시 장군은 그런 나폴레옹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있어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총사령관의 몫이다. 그 외의 부하들은 단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나폴레옹 자신이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도 문제였지만 도대체 이런 말을 하는 부하와 무슨 전쟁을 한단 말인가.

    나폴레옹의 패배는 갑작스런 폭우 때문
    《전쟁과 기상》의 저자 반기성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워털루 전투를 바라본다. 전쟁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6월 18일에 워털루는 전날 내린 폭우로 진흙탕이 돼 있었다. 기병과 포병의 신속한 이동을 중시하는 나폴레옹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영국군을 향해 정면 돌파 작전을 감행한 이유가 바로 날씨탓이었던 것이다. 네 장군이 그토록 무리한 작전을 감행한 것 역시 진흙탕에서는 보병보다 기병이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워털루 전투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전쟁에는 날씨가 큰 변수로 작용했다. '예나 전투'에서는 안개의 도움을 받아 프러시아의 15만 군을 물리쳤다. "남이 회의할 때 나는 기동한다"는 나폴레옹의 신념은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멋진 작전이었다. 게다가 안개 속에서는 병력의 숫자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전투 이후로는 날씨가 더 이상 나폴레옹의 편이 아니었다. 워털루 전투 직전 프러시아 군을 추격하던 프랑스군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 역시 갑자기 쏟아진 폭우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날씨를 조금이라도 전쟁에 이용할 줄 알았다면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