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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5.10

백제 의자왕은 정말 무능한 왕이었나요?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삼천궁녀로 많이 알려져있으며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 기록을 보면 지혜롭고 훌륭했다는 내용이 꽤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 왕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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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義慈王, 599년[1][2] ~ 660년, 재위 : 641년 ~ 660년)은 백제의 제 31대, 마지막 국왕이다.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의자왕이 술과 음란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멸망했다는 점을 비판할 때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사비성 함락 직전 때는 군대를 보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비슷한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인데,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쓰여 있다. 비록 3천명은 아니지만, 의자왕의 궁녀들이 타사암에서 물에 뛰어든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는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9]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이 지은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

    출처: 위키백과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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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품이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냈으므로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였던 증자에 빗대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며 중국 기록인 구당서, 부여융 묘지명에도 의자왕을 효행이 깊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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