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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듯한숲제비109
깍듯한숲제비10923.07.24

나당 전쟁 시작의 이유와 전개 그리고 결과가 궁금합니다.

진덕 여왕 때 나당 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백제가 멸망하고 차례로 고구려도 멸망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관점으로 보면 보급로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당나라의 보급이 완벽했더라면 신라가 당나라를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나라도 땅이 넓었는데 왜 한반도를 지배 하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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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나라와 싸워 백제의 옛 땅을 되찾다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은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와 옛 고구려 장군 고연무가,

    1만 명의 군사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7세기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을 함락하면서, 신라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신라는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고구려와 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신라는 당과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당 태종(太宗)을 만나 상호 입장을 조율했고, 결국 6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합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직후부터 당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에 도읍을 정해줌으로써 고구려 부흥군과 유민들을 대당항쟁에 이용하였다. 670년에 신라군이 당나라와 부여 융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하였고, 671년에는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군의 침략이 격화되어, 672년 당나라 고간의 대군과 격돌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674년 신라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고서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675년 당나라 설인귀의 침공을 격파하여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이 이끈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격멸하였으며, 676년에는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패퇴시켰습니다.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합니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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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김춘추와 당 태종이 만나 나당 동맹을 결성할 때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고 나니 당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의 옛 영토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적으로 한반도를 다스리려는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늘 자신들을 짓누르던 패배의식과 불안감의 원인인 한반도가 완전한 자기네 땅이어야 안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원래도 당의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면 상대적으로 약한 신라를 나중에 다 집어삼켜서 한반도 전체를 당의 손아귀에 넣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하지만 신라는 철저한 전쟁 준비와 고구려부흥세력을 포섭하는 등 하여 웅진도독부를 쳐내고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신라도 당과 손절할 시기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 있었으나, 토번국도 견제해야 해서 계속해서 나당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은 버리지 못해 패퇴하여 요동으로 옮긴 웅진도독부 건안성에 백제유민을 옮기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대방군왕에 봉하여 이른바 소백제국의 세우고 한반도의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유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한 고구려의 옛 땅과 그보다 더 넒은 영토를 차지한 대진국 발해의 등장으로 당은 더이상의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반도는 산지형으로 되어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이고, 삼면이 바다로 되어있어 무역과 교역에 탁월한 입지이며, 비옥한 토지로 곡창지대가 많아 식량조달에 좋은 전초기지가 될 수 있으니 당에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였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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