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는 대립하였지만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예를들어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친러 내각을 구성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반면 명성황후는 민씨 가문을 요직에 등용하여 세도 정치를 재현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개화에서도 급진개화파는 대립하면서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명성황후는 외세의 침략 과정에서도 조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민씨 척족을 우대하고 왕비의 국정 개입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