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우렁찬도마뱀39
우렁찬도마뱀3923.04.11

최윤덕 장군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떤인물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등등요

최윤덕 장군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떤인물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등등요 어디서 출생했고 어느시대에 활약을 하셨는지도 알고 싶어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윤덕 [ 1376~1445] 고려가 무너지기 직전인 1376년(우왕 2) 경상도 금주(金州) 의창현(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아버지 최운해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최윤덕의 가문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으로 할아버지 최록은 정4품 호군을 지냈으며 아버지 최운해는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서 고려에서 회군공신이 되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이성계를 따른 공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최운해는 1393년에는 양광도, 1396년에는 경상도 영해, 장기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서거정이 저술한 야사인 필원잡기에 따르면 최윤덕의 친모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하고 최운해는 변방에서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최윤덕을 이웃의 양수척(백정)이 양육했다고 합니다.

    조선 개국 후 1402년 식년시 무과에 3등 20위로 급제하고 1410년에는 중시(重試)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된 그는 태종, 세종 치세에 크게 활약하여 세종 연간에는 김종서와 함께 4군 6진을 개척하였고 그가 개척한 곳은 여연(閭延), 무창(茂昌), 자성(慈城), 우예(虞芮) 4군으로 서북 4군이라 불립니다.

    최윤덕은 꾸준히 승진하여 스스로 무장이라는 이유로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1433년 우의정이 되었고 1435년 문반 최고위직인 좌의정까지 올랐습니다. 다만 무신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다른 업무는 면제되고 특별히 북방 문제만을 전담하였지요. 무신에 대해 이 정도의 대우는 드물어서 이전에 무신으로 정승이 된 이는 개국공신으로 최초의 두 정승 중 1명인 배극렴과 1차 왕자의 난의 공신인 조영무 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대마도,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이순몽과 같이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간 말종으로 유명했던 무신들과 달리 최윤덕은 폭행 사건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아 문신들도 존중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윤덕은 본관이 통천(通川)이며 자는 여화(汝和)백수(白修),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그는 고려가 무너지기 직전인 우왕 2년(1376)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에서 최운해(崔雲海, 1347~1404)와 창원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대마도 정벌

    2.이만주 정벌

    파저강 인근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고 평안도에 4군을 설치하는 공을 세운다.

    3.축성도감설치의 공이 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조 초기의 무장, 자는 여화, 호는 임곡, 시호는 정열공, 본관은 통천, 지중추부사 운해의 아들. 고려 우왕 (1376년)에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등촌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에 사망하였다.

    인물연혁

    14세때 활쏘기를 잘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학문은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조선조 태조 3년에 갑무과에 합격하였다. 21세 때 부친을 따라 영해의 반포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에 삼군도절제사로서 대마도에 출정하여 점령하고 천신산에서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받았다. 세종 15년 계축에 야인 이만주가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을 건너 침입하여 인민을 학살하므로 장군이 도절제사로서 평안·황해 2도 군병 1만5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야인을 격퇴하였다. 세종 15년 왕은 선위사 박신생을 군영에 보내어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장군이 개선하는 날, 세종은 근정전에서 큰 연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위로하였다. 세종 16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것은 무인에게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장군은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서 이름이 남았고 장수로 30년을 지내면서 그 위력이 변경에까지 알려졌다.

    유래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종은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제사 물품을 하사하고 시호를 정열공(貞烈公)이라 하였다. 세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평안도 안주 청천서원에 봉향되었으며 통천 풍계사(楓溪祠)에 봉향하였다. 묘소는 창원시 북면 대산리 갈전 부락 뒷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조 초기의 방형묘로 이 부근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분묘이다.

    정열공은 우리 고장 창원에서 탄생한 역사적 인물로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공의 정려각(旌閭閣)은 창원시 소답동(구 창원읍 동문 밖)에 있고, 정열공 최윤덕 장상 신도비를 1996. 5. 20 건립 창원시 용지공원에 있다.

    출처.....창원의인물 자료인용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윤덕 장군은 조선 세종대왕 시절 북방 개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당시 대표적인 무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에 대해 한글 창제라던지 서적 편찬 농업 과학발전등 훅정 운영과 문치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알고있지만 세종의 매우 훌륭한 점은 문무 양쪽으로 모두 뛰어난 성과를 거둔 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문치뿐 아니라 조선의 국경을 개척해 확장하는 업적을 이뤘는데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크게 공헌한 인물이 바로 최윤덕 장군입니다.

    최윤덕 장군은 1372년 창원에서 창원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해서 무과로 입신한 인물입니다. 가문자체가 대대로 무인으로서 업적을 이룬 가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최운해)가 태조 이성계에게 엽력한 공신이었습니다. 이 최윤덕은 무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반직 중 최고인 좌의정까지 올랐다는 점이 그의 무인 능력을 넘어서 정치력과 관직능력또한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주요 업적으로 당시 여진족의 침입과 싸우면서 북방을 개척했고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세종의 당부로 오랜기간 변방에서 국방사수를 위해 복무하며 나라를 위해 일한 업적이 쌓여 국방정책을 주도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후 세종의 깊은 신임으로 우의정에 임병되고 이후 얼마되지 않아 58세에 좌의정에 오르게됩니다. 최고의 문반직까지 올랐음에도 최윤덕은 필요할때마다 국방의 문제에 지체없이 나섰으며 문반위주의 관직 구조에서 무인으로서의 직무를 훌륭이 해온 장군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윤덕은 본관이 통천이며 자는 여화, 백수, 호는 임곡, 시호는 정렬입니다.

    고려가 무너지기 직전인 우왕 2년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에서 최운해와 창원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 최윤복, 최윤온, 최윤례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여 그 뒤 음관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으며 1402년 낭장이 되고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습니다.

    1406년 지태안군사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었고 동북면조전병마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에 올랐으며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가 되어 동맹가첩목아를 복속시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습니다.

    영길도도순문찰리사, 우군총제, 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했으며 1419년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 1421년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 병조판서에 올랐습니다.

    1433년 파저강의 야인인 이만주가 함길도 여연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 이 공으로 우의정 특진,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칩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로 나가 이를 진압했으며 돌아와서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이말수있도록 요청하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1435년 좌의정으로 승진,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 후 1445년 궤장을 하사 받았습니다.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해 공무의 여가를 이용해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윤덕은 세종 시대의 유명한 장군 입니다. 1419년(세종1년) 조선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5월 14일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어 그해 음력 6월 19일 장천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삼고, 영의정 유정현을 3도도통사로 하고, 참찬 최윤덕을 3군도절제사로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최윤덕 장군은 1433년(세종15년) 1월에에 평안도 절제사로 최윤덕을 임명하였고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처음 정벌군의 규모를 3천을 논하였으나 최윤덕이 아뢰어 1만이상의 군사로 정하였다고 합니다.